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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친환경로컬푸드

‘대사 나이 21세’의 영광은 양평의 채소들과 함께

by 문영

요리를 하기 싫었다. 집 안에 음식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집 안에 음식 냄새가 풍기면 그들이 자꾸만 우리 집을 찾는 것 같아서.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서울의 오래된 동네, 오래된 빌라, 음식점 많은 번화가에 살면 서 그들과의 조우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의 삶을 마주하는 것 도 무섭지만, 죽음을 뒤늦게 발견하는 것도 똑같이 무섭다. 청소하다 보면 언 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를 검은 그들을 종종 마주쳤다. 지구는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인류보다 그들 종족의 역사가 훨씬 길다지만, 그들과는 지구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우스운 얘기지만 서울을 떠났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 바퀴벌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넓혀지지 않는 그들과의 거리. 물론, 시골에서도 환경이 적절하게 조성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다만 자연 속에서 다양하고 거 대한 곤충 친구들을 통해 단련된 담력 덕분인지, 아니면 바퀴벌레의 천적들 이 많아서인지 시골의 바퀴들은 영 맥아리가 없고 느리다. 서울 바퀴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다.


그들을 핑계로 요리하기를 잘 기피해왔는데, 스스로를 시골 촌구석에 던져놓고 나니 생존을 위해 요리가 불가피했다. ‘시’민이 아닌 ‘군’민이 되면서 새벽 배송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배달되는 식당이 없으니 배달앱은 무용 지물이다. 8시가 되기도 전에 식당들은 문을 닫는다. 그보다 먼저, 해가 지는 7시 무렵이면 그 누구도 칠흑 같은 시골길을 나서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라면으로 시작했다. 채식 라면을 종류별로 사 모으고, 온갖 인스턴트 식품으로 찬장을 채워갔다. 그러다, 양심상 밀가루만 먹으면 안 되겠다 싶어 슬그머니 마트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는 차로 8분 거리에 있는 ‘지평 하나로마트’다. 서울의 동네 마트와 품목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요리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사야 할 줄도 몰랐다. 다른 마트에 가면 조금 다르려나 싶어 검색해보니, 집에서 15분 거리 용문에 양평에서 나는 식재료를 판매하는 ‘양평친환경로컬푸드직매장’이 있음을 발견했다.


IMG_5978 2.JPG 갈 때마다 한적한 '양평친환경로컬푸드직매장' 용문마룡점


긴 이름의 이 마트는 양평에서 나고 만든, 로컬 식재료와 가공식품을 판매하는 곳. 양평은 ‘친환경 농업 특구’로 지정된 농지가 많아 대부분의 채소가 무농약이나 유기농으로 길러진다. 채소와 곡류들도 있지만, 양평에서 만들어진 맥주나 막걸리도 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표고버섯이었다. 채식인에게 버섯은 고기와 같지만, 서울에서 국산 표고버섯은 비싸서 선뜻 사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친환경 마트에선 방금 따온 듯한 싱싱 촉촉한 표고 버섯 한 가득이 단 3,500원. 유통 마진이 빠진 덕이다. 표고버섯의 가격표를 본 그날이 처음으로 ‘양평에 참 잘 왔다’ 생각했던 순간이자, 나의 요리 세계가 180도 바뀐 날이다.


마트라고 하기엔 참 휑한 이곳을 서점에 비유하자면 일본에 있는 ‘모리오카 서점’이 아닐까. 뭐든 다 있는 하나로 마트는 교보문고.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책을 큐레이션 하듯 매대에 새로운 채소가 등장하는데, 거꾸로 나는 이 마트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채소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감지했다. 봄에는 각종 봄나물이 저렴한 가격을 뽐내며 매대를 점령하는데, 그때까진 참나물이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참나물로 파스타를 해 먹는 것을 보고, 참나물을 사다가 흉내를 내보았다. 내가 요리한 참나물 파스타가 제법 맛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제철 채소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에 더 감격했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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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늘 ‘오크라’가 등장한다. 일본의 미소 된장국에 별 모양으로 잘린 오크라만 봐서, 반드시 된장국에 넣어야만 완성되는 재료인 줄 알았다. 잘라서 끓이는 대신, 오크라를 세로로 길게 반으로 갈라 소금 후추를 뿌 리고 프라이팬에 구워주면 시골 나홀로 식탁은 갑자기 파인 다이닝이 된다. ‘땅콩호박’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 이름도, 모양도 낯선 땅콩호박은 단호박 과 비슷한 맛이 난다. 단호박이 비싸다고 느껴질 땐 언제나 제철인 땅콩호 박이 나와 우리 개들을 위한 맛있는 간식이 되어주었다.


어떤 제철 재료가 등장할까 기대하면서 마트를 찾고, 한 번도 돈 주고 사본 적 없는 재료들로 요리 실험을 해보면서 지낸 2년. 누군가 만들어 준 맛을 즐길 줄만 알다가, 맛을 만드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이 됐다. 가열 요리를 넘어 발효과 베이킹의 세계까지 한 번 다녀왔다. 시골로 이사오지 않았 더라면, 오늘도 라면으로 저녁을 떼웠을지 모른다. 작년, 33세의 나이에 건강검진을 통해 얻은 ‘대사 나이 21세’의 영광은 양평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채소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


“깐마늘 보관할 때 키친타월 넣어 둬야지.”


전엔 차려주는 밥만 먹던 딸이 요리도 제법 하고, 식재료를 보관하는 일에 있어 본인에게 훈수를 두자 엄마는 물었다.


“근데, 넌 결혼 안 할 거니? 남자도 좀 만나고.”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 굳이 할 필요 없다더니. 정말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 니 슬슬 걱정이 되는가보다. 하지만 엄마는 결정적인 사실을 모른다. 난 1인분만 잘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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