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짓기의 시작
이제는 좀 어른으로 보이고 싶어 시도한 숏컷에 어울리는 어른의 일을 했다. 어릴 때는 나이가 차고 돈만 있으면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려면 수많은 ‘결정’의 최종 보스가 될 수 있어야 했다.
집을 짓기로 마음먹은 후, 건폐율과 용적률이 뭔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땅을 보러 다닌 지 어언 1년 반. 이제는 어느 부동산에 대뜸 들어서도 뜨내기 취급은 받지 않는 정도가 됐다. ’우여곡절’이라는 단어 하나에 담기는 억울할 정도로 좌절과 환희를 곡예 하듯 넘나들던 내 땅 찾기 여정. 지난주 토지 계약을 마치고, 어제는 그토록 고대하던 일을 했다. 바이아키텍쳐 사무실에서 도장 찍기! 89년생 뱀띠가 올해는 문서운이 있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구제샵에서 삼천구백 원 주고 산 니트를 COS에서 산 거냐고 해주는, 이토록 자비로운 이병엽 소장님이 이끄는 바이아키텍쳐와 나의 도장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멀고도 가까운 친구로 지내며 각자 쌓아온 취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수다스러웠는데, 집, 그것도 내 집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는데 왜 머릿속이 새하얗고 버벅대는지. 이 집은 35년 간 쌓아온 취향을 자연히 담겠지만, 앞으로 수십년 간 쌓을 미래의 취향 또한 담는 그릇이어야 하기 때문일까.
종종 집 짓는 과정과 생각을 글로 기록하려 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내 것‘을 갖기 어려운 세상에서 젊은 나이에 내 집 마련을 이야기하려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낯뜨겁다. 중학교 때 다들 신는 메이커 운동화 하나 사달라 말 못해 시장표 짝퉁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예나 지금이나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집안의 딸이지만, 내게 주어진 감사한 조건들이 누군가에게는 숱한 노력에도 머나먼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저, 행복을 내일로 미루기보다, 빠듯하고 무리해서더라도 오늘부터 당장 행복으로 빼곡히 채우고자 하는 한 인간의 ‘대안적 삶의 실험’ 정도로 읽혔으면 한다. 대부분이 떠나지 못하는 서울을 기어이 벗어나, 1인 2견이라는 비전통적 가족 구성을 이루며, 국민의 99%가 섭취하는 고기를 안 먹는 채식인으로 살면서, 가장 골치 아픈 방법으로 주(住)를 찾는 한 인간의 여정. 그 모험담이 색다른 행복을 좇는 누군가에게 단서가 되기를. 그 누군가와 함께하는 비인간 동물의 행복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기를.
복병이 삼천구백 개쯤 숨어있을 집 짓기. 이 이야기의 끝이 찬란한 성공담일지, 쓰디쓴 실패담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집을 짓는 이야기는 결론이 어찌 됐든 ‘성장담’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