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는 말
건강하고 현명한 할머니가 되고 싶은 이유
아주 어려운 주차를 단번에 성공한 남편에게 '운전은 정말 잘한다니까. 다른 건 다 못하는데.' 라며 농담을 건넸다. 내 딴에는 음식점에서 메뉴 주문을 잘 못하는 것 같은 남편과 나만 아는 유머를 한 것인데 웃으며 받아준 남편과 달리 뒷자리에 있던 우주가 발끈한다.
"엄마. 아빠가 다른 건 왜 다 못해요! 설거지도 잘하지. 과자봉지도 잘 뜯지. 쓰레기도 잘 버리지. 회사에서 돈도 벌어오지. 그런데 왜 다 못한다고 그래요. 네?"
울기도 참 잘하는 여린 우주는 아빠의 대변인이 되어서 벌게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인다. 또 뭐라고 했더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아빠가 잘하는 것이라고 나열하는데 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우선은 이미 뱉은 말이 후회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농담은 남편과 둘이 있을 때만 해야 했다. 또 하나는 '다 키워놨더니 아빠 편을 드네.'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느 날은 휴게소에서 다 같이 밥을 먹는데 남편이 먼저 다 먹고 핸드폰을 꺼내길래 가서 꽈배기 좀 사 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나는 아이들 밥을 마저 먹이고 있었는데 우주가 대뜸 '엄마는 왜 아빠를 시켜요?' 한다. 꽈배기는 그 휴게소 명물이었는데 식당에 들어오며 보니 줄이 꽤 길어서 미리 다녀오라고 한 것이었다. 순간 울컥해서 '너는 왜 아빠 편만 들어?' 해버렸다. 그렇다고 8살짜리에게 '동생 밥 먹이고 니 돈가스 잘라주느라 엄마 밥 못 먹는 건 안 보이냐.' 일장 연설을 할 수도 없고. '왜냐하면 아빠는 아무 생각이 없고, 엄마는 몸이 하나니까.'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운한 마음을 가다듬고 엄마는 지금 하나 밥을 먹이는 중이고 꽈배기를 사려면 줄을 서야 하는데 엄마가 가면 하나가 따라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누가 아들 아니랄까 봐 우주는 종종 이렇게 아빠 편을 든다.
어느 날은 남편과 내가 의견 차이가 있어 조금 큰 소리가 오갔는데 딸아이가 '아빠가 엄마 혼냈지. 내가 하지 말라고 할게.' 하더니 의기양양하게 아빠에게 가서 엄한 말투로 '아빠! 엄마 혼내지 마. 그럼 안돼.' 하는 것이다.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내가 아빠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며 귀여운 상황 보고도 잊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워낙 큰 소리로 얘기한 적이 없으니 싸운다는 생각은 못 하고 누가 누굴 혼내고 있나 했나 보다. 나도 남편에게 똑같이 큰 소리를 냈는데 딸은 완전한 엄마 편이었다. 하나가 딸이어서 그랬던 걸까. 우주가 종종 아빠 편이 되어주는 것처럼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래도 이렇게 내 편이 되어주는 하나가 있어서 우주가 아빠를 위하는 걸 덜 서운해 할 수 있었다. 남편도 나도 서로를 이해해 주는 가족이 있어 좋네 위안하기로 했다.
우주를 키울 때는 어릴 때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아까웠다. 하루 종일 붙어있는 신생아 시절에는 하루가 참 길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아이와의 시간을 생각하면 줄어드는 모래시계처럼 조마조마했다. 그건 온전히 이 아이의 성별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점점 나와 다른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나와 하고 싶은 것이 달라질 거고 좋아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설사 엄마와 취향이 비슷하게 자란다고 하더라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없는 강을 아들이라고 쉽게 넘나들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으로 결혼한 남편과도 이 강은 넓고도 넓기에.
내 아이가 남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어쩌면 이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어린 시절을 더 굵고 진하게 보내야지 다짐했다. 게다가 아들은 결혼하면 더욱더 멀어져야 할 존재가 아닌가.
내 짐작을 피부로 실감한 것은 우주가 5살 때였다. 수영장에 갔는데 이제 내가 우주를 데리고 여자 탈의실에 들어갈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었다. 5살 남자아이는 여자 탈의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문구가 마치 아이와 나의 철없이 즐거웠던 시절의 종말을 알리는 것 같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 편으로는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는 어찌해야 하나 궁금해졌다.) 물론 조금 큰 아이는 다행히도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떼쓰지 않고 아빠와 함께 들어갔지만 그 허탈함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이제 우주는 어디든 엄마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아기가 아니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던 아이에서 '남자아이'가 되었다. 조금 더 크면 게임을 하고 피시방에 다니고 스포츠 중계를 볼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전혀 모르고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중요해지는 그 '남자' 말이다.
하나를 낳고 주변에서 자주 들은 소리가 엄마에게 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아마 살림과 같은 엄마의 노동을 나눠 갖는 존재, 혹은 늙고 병든 부모를 돌봐줄 착하고 희생하는 자식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것을 오로지 딸 하고만 나눌 생각이 전혀 없는 엄마로서 그들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뜻이지만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럼요. 맞아요. 딸이 최고예요.'
반대로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것 역시 아들에게는 대를 잇는다는 허망한 책임감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기에 똑같이 대답했다. '맞아요. 아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요.' 아들이 있으면 좋지. 딸이 있으면 좋지. 아들만 있어도 좋고 딸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아이가 없어도 좋은 사람도 있을 거고.
모두에게는 각자의 '좋음'이 있을 테고 그 좋음의 모습도 제각기일 텐데 내가 가진 '딸 가진 행복'에서는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향이 난다. 기분 좋은 BGM이 잔잔하게 종일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폭발할 것처럼 화가 났다가도 아이의 보드라운 어깨를 안아주면 다 녹여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 발레를 배우러 다녔는데. 아이도 나도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발레라는 건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걸 배우는 거였다. '나 예쁘지. 너도 예쁘다.' 종알거리는 분홍색 어린이들 사이에 있으면 나쁜 생각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의 발레 시간은 일주일치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내는 정화의 시간이었다.
한 번은 하나가 하원하고 친구와 손을 잡고 놀이터로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는데 이런 세상이 들었다.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내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들고 뒤따라 걷는데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걷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는데 연말이라 여기저기 반짝이는 전구 장식을 보며 하나가 '와, 예쁘다.' 감탄했다. '엄마 밖에 봐봐요. 예쁘지. 너무 예뻐요.' 하면서. 꽃집에 가면 꽃에 코를 박고는 '음 향기로워. 엄마 나는 꽃이 좋아요. 너무 예뻐요.'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함께 감탄하는 딸이 있다는 것이 새삼 행복했다. 무척이나 상냥한 아들이었던 우주를 키우면서도 들은 적 없는 하나의 간지러운 말들이 내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 줬다.
나는 하나가 딸이어서 정말 좋았다. 하나와의 시간은 재깍재깍 무섭게 흘러내려가는 모래알이 아니었다. 이 아이와의 시간은 매 순간이 느긋하다. 역할놀이를 하는 지금도 나는 딸에게 단짝 친구이지만 아마 점점 더 이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같은 반 아이가 다른 친구와 더 사이좋게 놀게 되는 순간에, 예쁜 머리핀을 고르는 순간에, 짝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에, 첫 생리를 하는 순간에, 립스틱 색을 고르고 나란히 앉아 온탕에서 목욕을 하는 순간들에 말이다. 하나와의 시간에는 조바심을 느끼지 않아서 좋았다.
나와 이 아이 사이에는 강이 없다. 오로지 여자라는 것 하나로 나는 이 아이에게 친구가 될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물론 엄마와 딸의 사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미래에 우리 사이가 아들보다 가깝고 친구처럼 끈끈할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우주보다 하나에게 더 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이 무척이나 좋다.
나도 빨리 언니 돼서 엄마처럼 커피 마실 거라는 다섯 살 하나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와인을 마시는 데이트를 상상을 한다. 아이가 더 커서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지갑 사정은 좋지 않을 때면 나는 잠시 돈 잘 쓰는 친구가 되어 아이와 어디든 갈 것이다. 어릴 때 아이에게 모르는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이제 아이가 알려주는 세계를 열심히 쫓아다닐 것이다. 나와 엄마와 그랬던 것처럼.
하나가 결혼을 한다면 친정엄마가, 아기를 낳는다면 외할머니가 될 내 존재가 앞으로 더 필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건강하고 현명하게 늙고 싶다. 앞으로 남은 길고 긴 우리만의 시간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