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육아와 프랑스 육아의 중간쯤
모유 수유와 수면 교육의 정답을 찾아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나와 친하지 않았던 가드닝이나(정원을 돌보며 나를 키웁니다) 여행 에세이(여행자의 편지 치앙마이) 같은 것은 잘만 쓰면서 정작 내 삶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푹 빠져있는지 아는 주변 사람들은 종종 왜 육아일기는 쓰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그건 어느 정도 의도가 담겨 있달까.
우주를 임신하고 나는 흔히 그렇듯 육아를 책으로 배웠다. 살림이나 요리,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책 제작도 뭐든 책으로 배우는 것이 당연했고 또 좋아했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각종 육아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장 내 눈앞에 과제인 태교와 자연주의 출산부터 다양한 나라의 육아 방법, 부모 됨에 대한 책과 아빠 육아, 성별에 따른 육아 방법까지 다양하게 읽고 익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간에 더 많이 자고 더 많이 돌아다닐 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많은 육아서들이 모두 무의미했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우며 내가 알게 된 확실한 한 가지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적혀있는 출산과 육아는 내가 걸을 길을 이미 지나간 많은 사람들의 축적된 데이터일 뿐 그 길을 새로 걷는 것은 나와 내 아이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이 약간의 도움은 될지언정 믿고 따를 지침은 되어주지 못했다.
내 아이가 유일무이 한 존재이듯 아이와 나 사이에도 우리만 아는 것들이 존재했다. 그 끈끈한 결집은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라 우리 사이의 무수히 많은 사건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와 더 많이 대화하고 관찰하고 부둥켜안고 한 몸이 되어 지내다 보면 저절로 쌓이는 것이었다.
우주가 뱃속에 있었을 때 내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양극에 있는 것 같은 핀란드와 프랑스의 육아법이었다. 나도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노선을 정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 정답은 없더라도 어느 정도 감은 잡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두 육아법 모두 내가 따라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혼란스러웠다. (제가 읽은 책이 핀란드와 프랑스 육아법의 전부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육아서를 읽을수록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엄마 같았다. 핀란드 육아서에서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엄마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이기적이라는 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저자만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 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기적이라는 단어가 믿기지 않아 여러 번 책을 덮었다 펼쳐가며 내가 본 게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이기적이라니 게다가 이유 불문이라지 않는가. 모든 핀란드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테지만 그렇게 단언하는 자신감이 놀라웠다. 핀란드식 육아에서 엄마와 아이의 애착,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아이 모두 1년 넘게 모유 수유했다. 나중에야 수유가 밥 먹기보다 쉬웠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데 가슴과 젖꼭지만 있다고 해서 다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기와 맞는 자세를 찾기 위해 카페에 가입해서 밤낮으로 검색을 하고, 수유 방법을 잘 알려준다는 수업에 가고, 유명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가 마시지를 받는 등 온갖 시행착오와 고통을 겪어야 엄마는 비로소 아기에게 모유를 줄 수 있다. 게다가 유선염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샤워할 때 가슴에 물줄기가 닿는 것이 마치 유리조각이 박히는 것처럼 따가워서 샤워도 잘하지 못했다. 옷이 가슴에 닿는 것도 아파서 윗옷을 입지 못하고 지냈는데 그때마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남편은 홀딱 벗고 다니는 나를 보고 아프리카인 줄 알았다며 놀랐지만, 그게 대수인가 지금 내 젖꼭지에 불이 난 것 같은데.
그런 역경 속에서도 모유 수유를 중단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무척 뿌듯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운 좋게도 산후도우미 자격증이 있는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셨고, 출근을 하지 않았으며, 언제 어디서든 수유를 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갖고 있었다.
유축을 할 수 없는 환경이거나, 몸이 아프거나,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아이가 젖을 잘 빨지 못하거나, 아기가 황달이 심하다거나, 분유를 줌으로써 남편과 육아를 동등하게 나누고 싶었거나, 밤에는 아이와 엄마 모두 깊게 잠들고 싶었거나 등등 얼핏 생각해 봐도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아기에게 좋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건 한 인간의 젖꼭지와 관련된 것이다. 세 시간에 한 번씩 젖꼭지에서 줄줄 모유가 흘러나오는 삶을 살게 될 여자의 젖꼭지 말이다. 신상아를 다 키워 놓고도 여전히 그 핀란드의 육아법 책을 떠올리면 모유 수유는 당사자인 엄마의 건강과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주변에 모유 수유를 하지 않은 좋은 엄마를 과장을 보태서 백 명쯤은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을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기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안 그래도 엄마로 살기 쉽지 않은 나라인데,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날 선 시선을 보내는 모든 것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싶은 마당에 이기적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반대로 프랑스 육아 책에서는 아이와 바로 분리되어 술을 마시고 흡연을 하는 엄마들이 나왔다. 유모차를 끌면서도 흡연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건 또 무슨 세계란 말인가. 한 때 몇 년 간 흡연자로 살았던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프랑스는 흡연에 관대해서 놀라는 내가 촌스러운 걸까? 아이를 낳고도 엄마라서 이전의 생활과 달라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일까? 책을 읽을수록 프랑스의 육아는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삶 전체가 송두리째 변하지 않는다는 것, 아이는 엄마에 존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대강 알겠는데 그렇다고 모유 수유를 선택지에서 바로 제외하고 와인을 들이키며 자유를 외치고 싶지는 않았다. 핀란드도 프랑스도 이해는 가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은 육아 방법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것은 수면 교육 때 절정에 달했다. 수면 교육은 신생아를 키우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골치 아픈 과제였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고 있는 사람과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수많은 후기와 찬반 토론을 읽으며 나는 실천하지 않았다 뿐이지 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고민하다 수면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고 딱 한 번 30분 동안 우주를 울린 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오래 울어본 적 없는 순한 아이가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꼬박 30분을 목이 쉬도록 울었다. 내 인생에 그날처럼 후회되는 순간이 없었다. 수면 교육을 시도한 것을 후회한다거나, 수면 교육을 실패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을 책이나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했다는 이유로 확신 없이 시도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8살과 5살의 아이를 여전히 양옆에 끼고 잔다. 그게 좋은 육아 방법이냐고? 그럴 리가. 여전히 어깨가 결리고 한두 번은 잠에서 깬다. 하지만 아이를 재우는 올바른 방법이 오직 한 개뿐일까.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현관에 주방이 딸려있는 방 한 칸짜리 집이었는데 거기서 가족 넷이 뒤엉켜 잠을 잤다. 그럼 좁은 집에서 사는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재우지 못하는 것일까? 애초에 아이를 잘 재우는 방법 같은 것을 책에서 배워 정답을 찾으려니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는 것이 좋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두 아이 사이에 끼어서 꼼짝 못 하지만 아직은 그 고단함이 좋다. 8살 우주는 아빠랑도 자고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랑도 자니까 혼자 자라면 아마 바로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엄마 내 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이제 혼자 갈래요.' 하기 전까지 아직은 좀 끼고 있고 싶다.
아이를 따로 재워야 한다는 사람들은 어른들이 혹시 아이를 깔고 자거나 이불로 덮어서 호흡곤란이 오는 것을 걱정하는데, 신생아 때는 어른 침대에 아기 침대를 붙여서 사용했고 더 커서는 범퍼침대를 사용했다. 엄마의 수면의 질을 위해 분리 수면을 권장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잠결에 아이의 숨소리를 듣는 것과 내 수면의 질을 맞바꾸고 싶은 엄마도 있는 것이다.
새벽에 온도가 내려가면 아이들이 발로 차낸 이불도 덮어주고, 중간에 일어나 가습기 물도 채우고, 이마가 따끈하지는 않은지 만져보고, 잠결에 울면 바로 일어나 토닥여주며 아이와 함께 자는 엄마는 밤 사이에도 할 일이 많다. 물론 피곤하지만 잠결에도 아이 몸에 손가락 하나는 닿아 있어야 마음이 편한 걸 어쩌나.
신혼부부 시절에 나 역시 남편과 떨어져서 혼자 자는 게 싫었는데, 세상에 태어나 겨우 100일 남짓의 아기가 혼자 자는 것을 교육받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를 의지해서 자고 깨고 먹는 그 조그만 아이가 벌써부터 혼자 잘 필요가 있을까 의아했다. 엄마와 꼭 붙어 자란 내가 독립심이라면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어른 사람으로 자랐는데, 이 아이를 몇 년 더 옆에 끼고 잔다고 해서 독립심 없는 어른으로 자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수면방법을 찾기 위해 나는 내키지도 않는 수면교육을 했던 것이다. 사실은 내 옆에서 안전하게 재울 수 방법을 찾아 낮에도 밤에도 붙어있고 싶었으면서.
내 지인은 200일이 지난 후부터 수면 교육을 했고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아이는 방에서 따로 잔다고 했다. 지난 수년간 낮에는 힘들어도 밤만큼은 뒤척임 없이 잘 잘 수 있었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밤사이 충전한 에너지로 낮에 더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이도 마찬가지라고 얘기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두 아이 모두 수면 교육을 하지 않은 내가 그 엄마를 매정하다 비난할까? 천만의 말씀. 그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낮과 밤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은 그대로도 좋았을 것이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정답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는 길을 잃는다. 겨우 8년짜리 엄마지만 내가 배운 유일한 정답은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공부하고 고민하되 답은 육아서가 아닌 아이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는가.
아이에게 좋은 것인가.
아이도 그렇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