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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Nov 15. 2022

커피맛 쿠크다스

오래 앉아있던 손님의 뇌물


아이가 발레를 배우러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라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다른 사람의 카트에 담긴 초콜릿 틴케이스를 보고 충동적으로 지하 식품 매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사이, 초콜릿 사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묻는 아이에게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라서 그런 거라고 알려줬다.

"엄마! 그럼 내일이에요."

"설마 아직 아닐걸?"

믿기지 않는다는 내게 큰 아이가 어서 핸드폰으로 확인해 보라고 재촉했다. 11월이 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오늘이 10일이구나.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속은 것 같은 기분에 핸드폰 캘린더 속 네모난 테두리 안에 10이라는 숫자를 여러 번 확인했다.


지하 식품 코너로 내려가서 예쁜 틴케이스를 얻기 위해 만 원짜리 허쉬 초콜릿을 샀다. 아직도 이런 예쁘지만 쓰잘데기 없는 것에 마음이 빼앗기다니, 평생 부자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사지 않아도 부자는 영영 되지 못할 것이다. 둘째 아이는 유치원에서 친구들에게 나눠 주겠다며 커다란 육각형 빼빼로 상자를 골랐다.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큰 아이는 유독 이건 맛있다며 킨더 조이 딱 하나만 카트에 담았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을 과자도 몇 개 샀는데 계산할 때 보니 3만 원이 넘었다. 칸쵸와 오레오, m&m 등등 내가 못 본 사이 둘째는 이것저것 열심히도 담아놨더라.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초콜릿 갑부의 삶을 누렸다.


저녁 먹고 간식 타임에도 아이들에게 야박하게 굴지 않고 개인당 한 봉지씩 통 크게 초콜릿을 먹었다, 동네 엄마에게도 하나, 택배 가져다주시는 기사님께도 하나. 갑자기 나눌 게 많아지니 정말 부유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음날 카페로 출근하는 길에도 우리 집 초콜릿 금고에서 하나 집어 들어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빼빼로 데이에 맞게 기다랗게 포장되어 있었던 커피맛 쿠크다스였다.


이 쿠크다스는 맨날 아메리카노 하나 시키고 앉아서 세 시간씩 일하는 손님이 사장님께 드리는 사죄의 선물이었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올 테니 잘 부탁드린다는 뇌물이었다. 조금 화려하게 포장된 쪽이 좋을까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초콜릿 앞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 그만두었다. 게다가 쿠크다스는 커피랑도 잘 어울리는 과자니까.


요즘 자주 가는 도서관 5층 카페는 새로 리뉴얼되면서 사장님이 바뀌었다. 인테리어와 메뉴도 달라졌는데 종종 시켜먹던 토스트가 사라졌다. 짝퉁 가리모쿠 소파가 사라진 건 좋았지만, 음료 외에 먹을거리가 없다는 건 나같이 오래 머무는 손님에게는 곤란한 변화였다. 작업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가면 자릿세 명목으로 뭐라도 더 주문하고 싶은데 디저트나 베이커리가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날은 음료라도 더 비싼 걸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메뉴판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취향은 어디 안 가는지 역시나 아메리카노 외에 마시고 싶은 게 없었다. 뭔가 대단한 거라도 시킬 것처럼 오래 서있던 게 멋쩍어서 '매번 고민해도 항상 아메리카노'라고 실없는 말이나 건넬 뿐이었다.


이 쿠크다스는 언제 드리는 게 좋을까. 커피를 주문하면서 드릴까, 그러다 서비스라도 주시면 곤란하니까 (별게 다 걱정이다) 나갈 때 전하기로 했다. 그날도 매장 안에 손님들이 한 바퀴 회전하는 걸 보며 일했고, 사장님이 바빠 보이지 않은 틈을 타서 다 마신 컵과 커피맛 쿠크다스를 건넸다. 막상 빼빼로 데이에 과자를 드리려니 사장님이 남자라는 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유부녀는 이런 상황에서 유리한 편이다. 게다가 애 엄마가 아닌가. 혹시나 아내분이 알고 기분 나빠하지 않으실까. 미혼일 수도, 아내가 아닌 여자 친구가 기분 나빠할 수 있겠지만 사장님이 아가씨든, 할아버지든, 외계이든 드렸을 것이다. 감사한 건 감사한 거니까.

 

겨우 쿠크다스 한 상자에 사장님은 저는 뭐 드린 것도 없는데 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셨고, 나도 계속 고개를 숙이며 문까지 뒷걸음로 나왔다. 오늘 빼빼로 데이라서요... 어제 애들이랑 마트에 갔다가 샀는데... 맨날 오래 앉아있다 가서 죄송해서... 중얼중얼. 몸은 문쪽으로 향하면서 고개는 사장님을 향해 돌아간 채로 생각나는 대로 떠들며 어색하게 카페를 나왔다. 소심한 나에게 친하지도 않은 카페 사장님께 과자 하나를 전달하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맨날 아메리카노만 시키고 오래 앉아있던 어느 손님이 여길 좋아한다는 걸,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사장님께 전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셀프로 운영되지만 할아버지 손님이나 유모차를 끌고 온 아기 엄마에게는 직접 커피를 가져다 드리는 사장님의 다정함을 응원한다는 건 언젠가 단골이 되면 말씀드릴 기회가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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