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시간이 아주 늦거나 아주 이른 편인 경기도민의 숙명을 태생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서둘러 출발했더니 다행히 오늘은 마을버스와 지하철 환승 운이 잘 맞아 '아주 이른 편'에 속했다. 친구들에게는 더 이상 지각을 했다간 너희에게 손절당할지 몰라서 일찍 왔다며 자조 섞인 메시지를 보내고, 적당한 카페를 찾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혼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무척 좋아한다. 근처 카페에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이야기하는 건, 미안해할 친구에게 서두를 필요 없다는 뜻 외에도 잠시 혼자 있고 싶은 나를 위한 핑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책만 한 권 있다면 친구들이 한두 시간쯤 늦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끔은 오히려 친구들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면 혼커 타임을 놓쳤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약속 전 카페에서의 기다림은 나에게 설렘과 즐거움이었다.
오늘은 어디를 갈까 검색하다가 홍콩과 일본에서 유명하다는 카페가 보였다. 어떤 곳인지 검색해 보니 한국에 처음 블루보틀이 들어왔을 때처럼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 기사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붐비는 곳이라 친구들과 여럿이서 가서 담소를 나누긴 어려워 보여도 혼자서 한 잔 정도야 괜찮을 것 같았다. 서울에 핫한 카페가 생겼다면 꼭 한 번 가고 싶은 지방러는 이렇게 발도장을 찍는다.
주문을 받는 직원은 아주 친절하면서도 사무적이었고 무척 빠르게 말했다. 계산대 앞에서 잠시라도 고민했다가는 민폐가 될 것 같은 급박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디가서 폐 끼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빠르게 등 떠밀곤 하는데 특히 핫하다는 곳에서 주문을 할 때 그렇다.
조금 긴장한 상태로 앞 손님들이 주문을 하는 동안 미리 메뉴판을 스캔해서 마시고 싶은 걸 골라 두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직원은 아마도 오늘 수 십 번은 이야기했을 대사를 나에게도 똑같이 읊었다. 메뉴 선택, 커피 사이즈, 원두 종류, 주차 여부, 마지막으로 대기 번호로 호명하겠다는 것까지 베테랑 연기자처럼 쉼없이 이야기 했다. 나역시 교토라테 따뜻한 것, 작은 컵으로, 여기서 먹고 갈 것, 원두는 싱글 오리진, 주차는 하지 않았다는 걸 NG 없이 유창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평소에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눈인사와 스몰토크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차라리 기계가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커피가 나오기 전에 다행히 자리가 나서 바 테이블에 끝에 앉았다. 의자는 높고 테이블은 그에 비해 낮은 아주 난감한 사이즈였다. 빨리 먹고 일어나라는 패스트푸드 가게도 이렇게 해 놓지 않는데... 의아해하며 빨리 일어날 요량으로 커피를 목구멍에 때려 넣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버거워하는 내 위태로운 허리를 위해서라도 카페 밖에서 걸으며 시간을 때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커피는 적당히 맛있었다.
내가 마신 건 연유가 들어간 라테였다. 갈만한 카페를 검색하다가 블로그 어디선가 단맛이 살짝 치고 나간다는 표현을 봤는데 과연 신뢰할 만한 리뷰였다. 적당히 달콤한 라테는 달콤한 것을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들뜨게 만드는 맛이었다. 가격은 6,800원. 용량도 적은 컵이었는데 뒤늦게 영수증을 보고 촌스럽게 조금 놀랐다. 사람들이 갑자기 나 빼고 한 달에 50만 원씩 더 벌게 되었는지, 내가 청주로 내려와 있는 사이 서울 커피값 평균이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비싸고 맛있는 한 잔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뭐든 책 가격과 비교하는 직업병이 있어서 커피 두세 잔과 책 한 권의 값어치를 저울질했다. 요즘 엔화도 떨어졌는데 이정도면 오히려 일본보다 더 비싼 가격이 아닐까. 요즘 물가가 올랐으니 커피 값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걸까. 왜 책 가격만 더디 오르는 것 같을까.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자면 커피 한 잔에 6,800원을 기꺼이 지불하려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유리창 앞이 마가리타와 나초를 파는 가게가 아니라 산이나 숲, 아니 꽃과 풀 정도는 되어야 했다. 커피값이 비싼 대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인생 샷을 지겹도록 찍을 수 있는 뷰가 있거나, 먹음직스러운 베이커리가 넓은 테이블 가득 군침을 흘릴 정도로 많거나. 강릉 바다든 경주 왕릉이든 공주의 상성이든 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색적인 뷰라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마도 나에게 커피란 카페에서 공간과 같은 무게를 하고 있어서 5분 만에 털어 넣듯 마셔버린 커피 값이 유독 아까웠나 보다. 친구를 기다리며 책 한 권을 펼쳐놓고 편하게 앉아 커피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면 적당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내가 가난한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