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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Apr 11. 2023

식은 커피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던 사람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미술학원에 다닌 건 아니었다. 그림 선생님을 수소문하던 엄마는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를 집으로 모셔왔다. 선생님은 회화 작가였다. 아마도 그림을 파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수익을 충당하기 위해 우리를 가르쳐 주신 것 같다. 


친구 한 명과 함께 서로의 집을 번갈아가며 그림을 배웠다. 이젤을 사고 물감을 사고, 화방에서 어느 브랜드의 붓을 사야 할지 고르며 무척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이 끝날 때쯤 선생님이 다음 수업시간에 필요한 정물을 얘기하면 엄마들이 번갈아 준비해 주셨다. 주로 사과나 유리병 같은 거였는데, 벽돌처럼 구하기 어려운 것은 길 어딘가에서 구해오기도 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이 멋있었다. 설레는 사랑의 감정이 아닌 예술가에 대한 선망에 가까웠다. 선생님의 옷에 항상 묻어있던 물감도 좋아 보였다. 새로 산 워커가 다음날 물감 범벅이 되어 왔을 때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은 개의치 않아 하셨다. 

사실 선생님은 뭐든 개의치 않아 했다. 내가 명암을 잘못 넣은 것도, 붓을 잘못 잡은 것도, 혼내는 법이 없었다. 잠깐 나와보라며 나와 자리를 바꿔 앉아 미숙한 내 그림을 마법처럼 근사하게 손봐주셨다. 그 무던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연필을 칼로 깎아서 적당히 뭉개졌을 때 마음에 드는 선이 나오는 것도, 붓에 물감과 물을 알맞은 비율로 묻혀 종이에 예쁘게 스며드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그림도 좋았고 선생님도 좋았으니 그 시절 내가 글이 아닌 그림을 전공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생일이었는지, 어떤 특별한 날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께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선물해 주셨다.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을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맨 앞에 적어주신 짧은 글 때문이다. 

'희정아.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자. 길가에 돌멩이 풀 한 포기 까지도'

그 말이 참 좋았다.


수업이 시작되면 엄마들은 항상 선생님이 드실 커피를 내오셨다. 선생님은 커피를 아주 천천히 드셨다. 뜨거웠을 때 한 모금, 우리 그림을 봐주다가 또 한 모금, 커피 잔에 아직도 한 참 남은 식은 커피가 보이면 선생님께 ‘선생님 커피 드세요. 다 식었어요.’ 알려드리기도 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괜찮아. 식은 커피도 좋아.’ 하셨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적당한 온도의 드립 커피보다는 팔팔 끓인 모카포트가 좋다. 친구는 내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누가 커피를 그렇게 마시냐고 놀리기도 했다. 커피를 무슨 국물 마시듯 후후 불어 마시냐고. 우아하게 마시면 좋으련만 나는 기어코 뜨거운 커피를 순대국밥 먹듯 마신다.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식기 전까지 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 잠깐이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다. 


일은 커피가 적당히 식을 때쯤 시작한다.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긴 하지만 커피가 다 식어버리면 더 이상 내가 좋아하던 그 커피가 아니다. 오늘은 커피가 조금 남은 잔을 두고 일어나려다 다시 앉아서 남은 커피를 마셨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자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식은 커피도 맛있다던 그 선생님은 아직도 그림을 그리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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