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현, 일본
2016년 가을에 훌쩍 떠났던 일본의 나라시 고조현 여행. 이땐 진짜 여기저기로 잘 떠나고 돌아왔던 것 같다. '평생 비혼으로 살겠어!' 하며 늘 몸과 맘 가볍게 살았었는데... 역시 사람의 일은 모른다.
갑자기 고조현으로 떠난 이유는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딱 꼬집어서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한국-일본 배우들의 잔잔한 연기도 좋았고 일본의 소도시를 과장 없이 담백하게 그려낸 것이 좋았다. 고조현에 가서 약간의 판타지아를 기대해 볼까 했지만 영화의 여운을 망치기 싫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떠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본으로 부지런히 여행을 했었다. 나의 첫 펜팔 친구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고, 한국에서 시각디자인 학부 전공을 마치고 무라시노미술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이어나가고 싶어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입학 당시에 원전 사고로 입학은 무기한 연기가 되었고 끝내 무산이 되었다. 그 이후에 일본을 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웬만한 곳은 다 가보기도 했고... 하지만 2016년 하반기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고 일본의 소도시 여행이 그리워졌는데 마침 고조현을 발견한 것!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시절 이전에는 여행을 가기 전날에 티켓팅을 했다. 지금은 파워 J가 되었는데 10년 전엔 그저 P여서 일본에 도착해서 숙소를 고르기도 했다. 아무런 서류도 비자도 필요가 없었던 놀라운 시절이 있었네.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굳이 고조현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길 잘 한 여행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고조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는데 <한여름의 판타지아> 영화 촬영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찾아볼 수 있었고 그 정보에 의존해 겨우겨우 찾아가게 되었다.
고조현에 도착하자마자 딱 떠오른 것은 일본의 80년대로 타임슬립한 것 과 같은 기분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장소들은 모두 실제 장소였기에 직접 보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도착하자마자 아주 오래된 여관에 짐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이때가 가을의 정점이어서 하늘이 정말 파랐고 공기가 아주 맑았다.
오래된 일본 디저트를 파는 가게에서 직접 구운 모찌를 두 개 샀다. 귀여운 할머니가 호호 불면서 모찌를 구우시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았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조현이 촬영지가 되었지만 실제로 찾아오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며 모찌 몇 개 더 챙겨주셨다.
그리고 오래된 여관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데 이곳은 약 60년이 된 곳이라고 하셨다. 어두운 나무 바닥 위를 걸으면 끼익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났고 무언가 축축한 공기가 무겁게 감싸는 것 같았다. 이때 당시 손님도 나 혼자여서 밤에 조금 무섭긴 했지만 준비해 주신 폭신한 이불과 따뜻한 차 덕분에 아주 꿀잠을 잤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고조현에서 한 사흘을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았고 영화의 여운을 그대로 이어갔었다. 그래서 여전히 기억에 남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고조현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추측으로는 모든 게 그대로이지 않을까? 귀여운 당고 할머니는 잘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