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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Jan 07. 2022

단단하던 모과도 변하네

변하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어?

막 저녁을 먹고 난 직후여서인지 김치찌개 냄새가 집안 구석까지 스며들어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환기를 할까 생각했지만 너무 추워서 주방 후드를 조금 켜놓고 설거지를 했다.

적으나마 도움이 된 건지 상쾌해진 느낌이 들었다.

행주까지 뽀득뽀득 빨아서 널어놓은 뒤 내 책상으로 와 차분히 책을 펴보려는 순간,

모과의 샛노랗던 표면이 늙은 노인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거뭇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검버섯으로 뒤덮여 가는 모과


남편은 가끔 필요 없는 물건을 아주 싼값에 많이 사 올 때가 있는데 모과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일 때문에 돌아다니다 요즘 같은 강추위에 좌판에 놓고 팔고 있는 사람이 안타까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그렇게 사 온 물건들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되어 식탁에 오르기도 하고 가끔은 재활용 분리수거 신세가 되기도 한다. 겨울철이라 모과차가 감기에 도움 된다고 비닐봉지 한가득 사 온 건데 향이 좋다며 내 자리에 두었던 것이 특별히 향을 내보지도 못하고 제 살갗을 짓무르게 하고 있었다.


겨울이면 모과차가 감기에 도움이 되는 것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쉽게 만들어 먹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자식사랑이 깊은 시어머니의 정성으로 각종 즙이란 즙은 베란다에 꽉 차 있어서 모과차까지 내리고 싶지 않아서 내 책상 위에 두었던 것이다.


초코빵처럼 반 이상이 거뭇하게 썩어가는 모과에서는 싱싱할 때보다 더 진한 향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표면은 오일을 발라 논 것처럼 매끈한 진액으로 뒤덮여 손 끝을 살짝만 갖다 대도 미끄덩거렸다.

책상 위에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뒀을 뿐인 모과는 왜 썩어갈까?

공기와 닿아서 변해가는 것쯤이야 과학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겠지.

검버섯이 핀 모과를 보니 어쩐지 나와 같다는 동질감이 들었다.

글을 쓰고 있는 내 손등에도 군데군데 검버섯이 조그맣게 올라온 게 보였다.

주말에 가끔 농사일을 하기도 한다.

우주의 어느 한 곳에서 떠도는 행성의 표면처럼 거칠게 울퉁불퉁 해졌고,

수분기가 빠져 주름살처럼 깊게 파여 있었다.

운동부족으로 늘어난 내 살과 수분기 빠져 자글거리는 눈가의 주름이 모과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초코빵처럼 시커멓게 변해가는 모양을 보니 당장이라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차라리 풋내 나는 모과에게 설탕을 들이부어 달콤한 차로 만들어 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모든 생물은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변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만히 놔둔 모과는 고인물이 썩듯이 서서히 변해간 것이다.

비단 모과뿐이겠는가. 우리의 생각도 사고 안에 갇혀 있을 때 막히고 고정되어 유연하지 못하다.

웅덩이의 고인물이 흐르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많은 미생물은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겠지만, 고여 있는 웅덩이의 물은 그대로 썩어간다. 우리의 생각도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면 관계 속에서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제 몸을 파고드는 이 모과를 치워야 하는데 어쩐지 자꾸만 내 모습이 오버랩이 되어 치울 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색을 보면서 온몸이 검버섯으로 뒤덮여서 쭈글거릴 때까지 놔둬 볼 작정이다.

내가 변해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모과의 변해가는 모습도 그 향이 다 할 때까지 내 곁에 두고 싶다.

처음 사왔을 때 모과 참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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