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되어버린 신념 : YouTube.
오늘의 음악 : like JENNIE - 제니 (Peggy Gou Remix)
‘정말 그렇네요.‘
나도 모르게 속으로 대답을 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들이 박수를 치기 위해 들썩인다. 깁스해서 손바닥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그날은,
수많은 노동단체들이 모여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집회를 연 날이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그의 절규는, “정년을 연장하라!”는 또 다른 목소리가 되어 광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선을 끄는 아저씨 한 분을 문득 마주했다.
엄하고, 강직해 보이는 인상. 그에 비해 조금은 화려한 노란 의상. 그리고 반듯한 글씨체의 단어들이 적힌 큰 팻말까지. 말이야 맞는 말인데, 마주친 상황이 너무나 뜬금없었기 때문에 눈을 떼지 못했다.
미국 주식 조심 2차 대폭락 늘 대비
나는 하마터면,
’정말 그렇네요. 미국장 지금 조심해야죠. 당연히 조정장일지, 하락장일지는 가봐야 아는 거죠.‘
라고 대답할 뻔했다. 노동권의 보장을 외치는 전태일 집회에 미장떡락에 대한 경고라니.. 너무나 신선했다. 그러던 중, 나는 그분의 얼굴에서 신념을 읽었다. 그의 눈빛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건 정말 내가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웃지 말고 잘 들어봐’라고.
신념과 믿음은 일련의 과정이다. 믿음을 증명하면 신념이다. 시련과 고난, 우연과 인연 속에서 어려움을 이겨낸 후에 믿음은 신념이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같은 생각은,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나서야 신념이 된 단적인 예이다. 노동권 보장. 인종차별 철폐. 성차별 금지 등은 인류의 유산과도 같은 신념이다.
그만큼 올바른 신념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의심과 부정을 이겨내야 하는 수많은 상황들이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튜브는 너무나도 쉽게 믿음을 신념으로 진화시켜 준다. 알고리즘은 믿음이 신념으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경로들만 찾아서 그려준다.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게 한다. 그러면 온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 믿음들이 예쁘게 지켜지면 좋겠지만, 우리는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믿음이 충돌하는 일들을 겪어내며 살아야 한다.
사회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까 충돌은 당연한 일이다. 마치, 출퇴근길 신도림역은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공간들이 침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여 살기 위해 갈등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그 지극히 단순한 지혜를.
그런데 유튜브가 그 갈등과 화해를 겪어낼 사소한 순간들을 앗아갔다. 가족 간의 대화가 사라진 공간에는 ’인기 급등 동영상‘이 들이찼다. 소파에서 서로의 다리를 꼬고 있어도, 마음은 각자 다른 공간에 가 있다. 혼자 사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유튜브가 가족이다.
유튜브가 앗아간 사소한 순간은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한 카페에서도 그렇다. 연인들이 모처럼 단장하고 나온 단풍구경 와중에도 그렇다.
만남 자체도 줄어들었다. 어쩔 때는 카카오톡에서 서로 대화하는 게 훨씬 반갑고 편하다. 막상 만나려면 여러모로 피곤한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니 사람들이 점점 온라인으로 삶을 옮겨간다.
유튜브는 사람의 믿음에 대한 확증편향을 준다.
단지 내가 좋아서 좀 더 봤을 뿐인데, 좀 더 검색해서 들여다봤을 뿐인데, 어느새 나를 그렇게 잘 안다. 내가 좋아하는, 좋아할 영상들만 쏙쏙 가져다가 바친다.
모두가, ‘나는 유튜브를 통해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을 하는 것 같다’고 믿게 된다. 그 세상에선 내가 하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일치하는 ‘정답’이다. 정답을 찾은 믿음은, 그렇게 신념이 된다.
너무 쉽게 형성된 신념들은 사람들의 미움을 부추긴다.건전한 신념은 서로 충돌하며 맞춰가지만, 뒤틀린 신념은 충돌하며 혐오를 낳는다. 쉽게 형성된 신념은 ‘검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의견이 마음에 들어올 자리가 없다.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 된다.
대 혐오 시대.
모두가 모두를 혐오한다. 유튜브 댓글, 네이버 댓글창 등, 실명이 드러나지 않는 인터넷 속 전장에서는 모두가 죽어라 피를 흘리고 있다. 고작 ‘가성비 좋은 집들이 선물 아이템 순위‘를 알리는 콘텐츠였는데 말이다.
이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 스마트폰은 과하게 똑똑하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똑똑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사이렌 오더로 시간착오 없이 효율적으로 아아를 수혈하는 것보다, 원두를 갈고 커피를 몇 번에 걸쳐 내리며 사색에 잠기는 것이 훨씬 더 삶에 많은 가르침을 준다.
갑자기 스마트폰을 부시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이미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를 부셔봐야 세상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는 주장만 옳다고 증명시켜 줬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조상들이 기계에 적응해 살게 되었듯, 이제는 우리가 인공지능에 적응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인간다운 순간들을 삶의 모퉁이마다 반드시 남겨놔야 한다. 스마트폰을 주기적으로 잠깐 멀리해야 한다.
가족의 눈을 보고 대화할 여유. 15분쯤은 책을 보고 잘 수 있는 여유. 10분쯤은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출근할 수 있는 여유. 주말에는 스마트폰을 침대에 치워 놓고 보지 않을 여유. 지하철에서는 친구들과 얘기할 수 있는 여유. 운동장에서는 공을 찰 수 있는 여유. 상대를 위해 음식을 차리고 차를 우려낼 여유 등을 삶에 회복해야 한다.
스마트폰과 멀어진 자리에서, 그렇게 우리는 타인과의 접점을 통해 화해라는 꽃을 조금씩 피워나가야 한다. 그게 이 대혐오시대를 끝장낼 유일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