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눈이 와

by 모래쌤

여보.

눈이 왔어. 펄펄 떡가루 같은 눈.

보통 어! 눈 온다 하고 1,2,3초만 세면 그치는 동네인데....


서울엔 진짜 눈 많이 오잖아.

여긴 눈이 안 오는 동네고.

비도 잘 안 오고.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








당신은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해서 우리 연애할 때도 눈만 보면 질색을 했지.

나는 그런 당신이 낭만이 없다고 퉁박을 주곤 했고. 그땐 그래도 막 싫은 티 내진 않고

눈만 오면 자꾸 군대얘길 하곤 했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본색이 드러나더만.

눈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치우고 나면 또 쌓이고 치우고 나면 또 쌓이는 게 눈이라.

눈만 오면 치울 걱정부터 했었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 심정 모르겠고요!


아무튼 눈이 오면 참 많은 추억들이 떠오르곤 하는데

나는 나쁜 기억은 별로 없거든.







나 마포에서 회사 다닐 때

건물 안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퇴근하러 나와보니 무릎까지 푹 빠질 만큼 눈이 왔던 날이 있었어.

점심시간에 나갔다 올 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후에 눈이 왔거든.

오나 보다 했고, 거긴 창도 작아서 밖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일하느라 바쁘다 퇴근을 하는데.

와~~~ 건물 입구에 나와보고 깜짝 놀란 거지.

삽시간에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도 있구나.

눈이 낭만적인 게 아니라 무서울 수도 있구나 처음 느꼈던 날이었어.








또 한 번은 왜 당신도 기억하지?

큰 애를 엄마가 돌봐주실 때여서 어린이집도 그 동네를 다녔잖아.

연말에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있었는데 토요일에.

행사가 늦게 끝났고, 눈이 오고 있었지.

밤 아홉 시 넘어서 마쳤던 것 같아.


그러고는 주일 예배 때문에 얼른 와야 했는데.


당신이 교회 일 때문에 늦게 같이 못 오고

뒤늦게 아들내미 재롱잔치 본다고 오는 바람에

우리가 그때 따로따로 가게 됐었어.

눈은 쏟아지고 밤이고, 춥고 신경이 쓰였지만 무조건 와야 했으니 출발을 했지.

아이는 내가 데리고 오는 게 나으니까 내가 태워왔고.

옆자리에 큰애를 카시트에 태우고 거진 밤 9시 반이 넘어 출발했던 것 같아.

춥고 눈은 펑펑 오는 밤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북부간선도로, 내부순환도로 지나올 동안은

떡가루 같은 눈을 보며

우와~~ 이쁘다.

운전하며 사진도 막 찍고 그랬던 기억이 나.









우리 동네쯤 와서 문제가 생겼지.

대로변이었는데 언덕이잖아 왜.

거기가 6차선인가 8차선인가 암튼 엄청 큰 대로였는데 그 언덕 위에

가로등이 하얀 눈을 비춰 밝게 빛나보였어. 야간개장한 스키장처럼.

그 앞에까지 가서 신호대기 하고 있는데...

언덕의 차들이 이상하더라고.



가만 보니

어떤 차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머나... 미끄러지는 거였어.

액셀을 밟다가 도는 차도 있고.

다들 엉거주춤 도로 위 여기저기 있네.


다행히 눈이 쏟아지는 밤이라 차들이 많지는 않아서 어떤 차들 둘이만 붙어있는 걸 보니

거긴 사고가 난 것 같긴 했지만 심한 사고는 아닌 듯했어.

'저길 넘어가야만 하는데... 어떡하지?

저 트럭도 저렇게 못 올라가고 있네.

비스토가 과연 올라갈까? '


나는 밑에서 고민했어. 어떻게 할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나는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가야 하잖아.'

하고는 카레이서가 되었지.


'부와앙~~~'

비스토가 엄청난 소리를 냈고,

다행히 바퀴가 헛돌지 않고 잘 올라가 줘서

언덕을 한 번에 넘었다는!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

거기를 지나 우회전을 해서 역 쪽으로 내리막길 있지?

거기는 진짜 차들이 안 다녀서인지 눈이 그대로 있는데 얼어있는 부분이 많더라고.

내려갈 엄두가 안 나서 머뭇거리다가

기어를 중립에 놓고 그냥 미끄러져보자 하는 마음으로 내려갔어.

(어디선가 그렇게 하라는 이야길 들은 것 같았거든.)

내려가는데 핸들 돌리려니 허당인 느낌.

'어. 어. 어. 어. 어. 어. 쿵!'

다 내려와서 결국 도로 끝 턱을 박고 섰지.

휴~

진짜 진땀이 다 났어. 그때.

다행히 아이는 재롱잔치로 피곤했는지 계속 자더라고.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혼자 난리를 쳤는데도.


간신히 집에 도착하니 거의 12시가 다 됐었는데.

당신이 아직 안 오는 바람에

잠든 아이를 안고 5층까지 걸어 올라갔지.


진짜 그땐 젊었다. 그치?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


당신은 나보다 거길 조금 늦게 도착했고, 그때는 그 도로를 통제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우회했고, 빙빙 돌아 다른 동네로 해서 오느라 1시가 넘어 들어왔었어.


"왜 그렇게 늦게 와서는..."

"아이고 이 사람. 다마스 그게 균형이 안 잡혀. 코너 돌 때 미끄러우니까 더 신경 쓰이고.."


하긴 우리 차도 아니니 얼마나 조심조심했겠나. 그렇잖아도 운전이랑 별로 안 친한 양반이.


돌아서 간 곳도 아예 길을 통제하고 있어 다시 또 다른 곳으로 갔었다고 하며

핼쑥한 얼굴로 들어선 당신이 말했지.


나는.

그 험한 길에도 아이를 무사히 잘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는 승리감, 뿌듯함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무용담을 떠들어댔지.

언덕 넘어가고 골목 들어오고 한 이야기를 과장을 섞어가며.

당신은 중간중간 끼어들어 잔소리를 했던 것 같아.

큰일 나니 앞으로 눈길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뭐 그런 잔소리 말이야.










며칠 전 떡가루 같은 눈이 떨어졌지.

꽤 오래 왔고, 꽤 많이 동네가 하얗게 뒤덮였어.



새벽에 -9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도 왔어.

2월 중순인데.



이럴 땐

집안을 뜨듯하게 해 놓고

어묵이랑 떡볶이 만들어서 먹었었는데.


내가 만든 떡볶이도 당신은 좋아했는데.

어묵은 특히나 요샌 끓일 일이 없어.

당신한테나 인기 있지 애들은 별로잖아.

먹으면서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시간 없어 못다 한 잔소리도 막 늘어놓을 텐데.









당신이 없으니

별 것도 아닌 일이 다 추억을 소환하거든.


그러니

안 오던 눈이 왔는데 오죽하겠어.


같이 앉아 이야기하고 싶다.

여보 오늘 저녁 떡볶이 어묵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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