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나

기록의 소중함

by 모래쌤

여보. 당신 휴대폰 찾았어. 그때 병원에서 준이가 계속 들고 있었는데, 수요일이었나 그날 하루 큰애 친구네 가서 같이들 잤었는데, 그날 거기서 잃어버렸다고 하더라고. 며칠을 못 씻고 병원에서 나랑 쪽잠을 자고 있어서 좀 씻고, 가서 자고 오라고 보냈는데 잃어버렸다는 거야. 당신 휴대폰 지문으로 잠가 놨고, 때때로 비밀번호 나한테 이야기해 줬던 것 같기도 한대 기억이 안나더라고. 하루에 겨우 한 두 번 면회 들어갈 때 그거 들고 들어가서 간호사 선생님께 좀 부탁해서 당신 지문을 좀 대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것도 못했어. 어찌어찌하다가. 모르겠어. 당신이 쓰윽 일어나 스스로 핸드폰을 만지게 될 거라고 기대를 했었나? 아니다. 그냥생각이라는 게 정지되더라고.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상황정리하고 딱딱 일 처리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거였어. 나는 아무것도 못했어. 그냥 일주일을 중환자실 앞에서 그냥 망연자실 앉아있었던 것 같아. 설상가상 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데, 거기 있는 정보를 캐려는 걸 못하게 되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정말 멀리 떠나는구나 하는 마음에 더 가까운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아. 근데 그걸 찾았다고. 일 년이 지나서.

어디서 찾았는 줄 알아?

걔네 집 걔 침대 밑에서 걔네 형 알지? 그 형이 찾았다고 연락이 왔대. 그렇게 찾아봐도 없다더니... 침대 밑에 있는 게.. 당신 폰이 작기나 하나. 그게 어떻게 그렇게 안 나와... 제대로 안 찾아 본 것 아닌지 그 식구들 참 성의 없더긴 정말 성의가 없구나 싶어 화가 막 나더라고. 등잔밑이 어두워도 그렇게 어두울 수가 있는지 참 이상한 일이야 정말.


매일 한 번씩 가능한 비밀번호를 넣어보고 있어. 잠금을 아직 못 열었어. 당신 사진첩이라도 보고 싶은데. 하긴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도 아니라 뭐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야.











생각난 김에 예전에 내가 썼던 휴대폰을 꺼내 충천을 했어. 사진도 그렇고 혹시나 당신 음성이라도 더 많이 남아있는 게 있나 싶어서. 충전을 하고 갤러리를 열었더니 엄마, 아버지도 모두 조금씩 더 젊으시고, 큰애는 훨씬 더 말랐고, 둘째는 어려서 똥똥하고 작고 귀엽고, 나랑 당신도 더 힘 있어 보이더라고. 얼굴도 팽팽하고. 훨씬 밝아 보이고. 여행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잔뜩이야. 소라랑 주아, 마리 미국에서 놀러왔을 때 함께 여행한 동영상도 많고. 거기 당신 목소리 많더라. 한참 봤어. 우리 진짜 많이 다녔잖아. 한 8년 진짜 많이 다닌 것 같아. 언니 먼저 간 후에 엄마 아버지 곧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 데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겠다는 일념으로 무슨 날 받아 높은 것처럼 막 틈만 나면 1박 2일, 2박 3일, 여름과 겨울에는 3박 4일 방학 만들어서 다녔었지. 분수에 넘치도록 엄마 아버지한테 한 부분도 많아 당신이 말은 못 해도 속상해할 때도 있었지. 내가 좀 앞뒤 생각이 없어서... 미안했어 여보. 힘들게 해서... 너무 어리석은 게 뭔지 알지? 당신이 먼저 갈 거라고는 정말 요만큼도 생각을 못했다는 거. 그래서 우선순위에서 밀어 놨었거든. 그게 제일 안타깝다 지금은. 에효. 오늘은 그런 이야기하려던 게 아닌데. 또 그 얘기했다.








그렇게도 가는 시간이 안타까워 잠도 안 자고 싶던 나날을 보내면서 늘 여행을 다녀오면 기록을 남기야지 했는데, 막상 돌아와서 눈앞에 닥친 일들을 쳐내다 보면 겨를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또 여행을 나서다 보니 먼저 간 여행은 내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졌었어. 너무 안타까워 그게. 나 기억 잘 못하잖아. 작년에 뭐 입었었는지 계절 바뀔 때마다 늘 새롭고. 당신은 참 그런 세세한 일들 기억 진짜 잘했는데. 어쩜 그렇게 기억력이 없냐고 뭐라하면 나는 주로 이런 핑계댔었잖아. '나는 날마다 새로운 생각거리가 너무 많다, 읽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지난 것까지 다 넣어둘 공간이 내 머릿속에 없는 거다. 그러니 자꾸 지난 일들은 지워진다고. (-.-;;) ' 그러면 당신은 '무슨 소리야. 옛날 일 게속 들먹이며 뭐라하는 사람이' 라고 반박을 했지 여보. 당신이 나한테 잘못한 일들은 따로 방이 하나씩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지워지지 않는 거야.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니까.








암튼 여행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사진을 봐도 이젠 오래된 것들은 여기가 어딘지 기억이 안나는 곳도 있네 보니까.

난 진짜 원 없이 다녔다. 여기 이사 와서 남쪽 지방은 다 간 것 같아. 그동안 가보고 싶던 남해를 다 가봐서 소원이 없다 이제.

엄마 진짜 좋아하셨어. 당신한테 늘 고마워하셨고. 아버지는 언제든 약간의 음주 가무를 즐기시며 손자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셨고. 리조트에 들어가 밥을 하고 고기 굽고, 찌개 끓여 맛있게 먹고 나면 큰애가 기타를 치며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노래를 몇 곡 해 드리지. 그러고 할아버지는 캔 맥주를 많으면 두 캔 적으면 한 캔 정도 드시고, 별로 댄스 곡도 아닌데도 마치 허공에 붓질하는 것 같은 특유의 춤을 추시지. 우리는 다 같이 까르르 넘어가고. 밤에 리조트 지하에 있는 오락실 가서 손자들과 재밌게 게임도 하시고 밤풍경도 구경하시고. 무엇보다도 아침에 일출을 보는 것이 좋았지. 주로 많이 걷지 않는 험하지 않은 곳을 여행지로 택해야 해서 우린 주로 바다를 끼고 여행을 다니니까. 회랑 매운탕도 많이 먹었어. 그렇지?

나는 회를 안 좋아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엄청 좋아하셨고, 애들도 잘 먹어서 바닷가에 가면 꼭 한 번씩 먹었잖아. 회를 사고 매운탕 거리 들고 숙소로 돌아와 함께 펼쳐놓고 먹으며 왁자하게 수다 떨었던 기억이 나. 산지에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고 당신도 좋아했고. 언젠가 킹 크랩도 먹었던 것 같다. 그거 징그러워 난 별로였지만. 난 꽃게탕이 좋은데.


여행지 달라도 먹는 것 노는 것은 늘 같은 레퍼토리였어. 꽃이 피는 봄이면 꽃이 피어서, 단풍 드는 가을 이면 단풍이 예뻐서, 추운 겨울엔 눈 쌓인 산을 보며 감탄하고, 손주들이 뭘 해도 그 하나하나에 감동하시는 엄마 아버지 모시고 다니며 힘들긴 해도 보람이 있었던 시간들이었지. 하지만 때때로 나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싶었어. 나 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종일 그렇게 있다가도 밤 시간을 즐기고 싶어 아무리 피곤해도 조그만 휴대용 스탠드를 들고 가 한쪽 구석에 켜놓고 책을 읽곤 했었지. 그러다 늦게 잠들었는데 새벽잠 없으신 노인네들 둘이는 부스럭부스럭 일어나셔서 빨리 아침을 드시고 싶어 하셨고, 말로는 "더 자" 하지만 행동은 "그만 일어나" 하시는 통에 결국 일어나야만 했었지. 때로는 당신과 둘이 바닷가도 걷고, 차도 마시고 데이트하는 시간도 갖고 싶었지만 그런 건 꿈도 꿀 수가 없었지. 그런 아쉬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 다음에는 둘이 여행 갑시다 하고. 기약도 없는 약속을 하곤 했었는데 말이야.






케이블카도 어지간한 유명한 곳에 있다는 건 다 타본 것 같다. 갑자기 당신 비닐봉지 뒤집어쓰고 달렸던 일 이 기억난다. 여수 갔을 때였나? 케이블카 타고 돌아오던 길이었나 가는 길이었나.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당신이랑 준이랑 비닐봉지를 어데어 얻어와서는 머리에 쓰고 달리는 바람에 우리 다 엄청 웃었었는데. 너무 웃겼어. 아직도 생각난다 그 장면은. 지금은 우리 집안 장신이 된 둘째 녀석 완전 똥똥이였을 때 당신이랑 둘이 같이 그러고 뛰는 바람에 다른 여행객들도 다 웃었어. 뛰는 모습은 또 좀 웃겼어야지. 어휴.






근데 여보, 너무 다녀서 재정이 바닥이 됐다고 생각하고 내 무계획을 스스로 탓하기도 했었는데 말이야. 진짜 다 한 때인 것 같아. 엄마 아버지는 이제는 진짜 한 시간만 넘게 차타도 힘들다고 어딜 안 가시려고 해. 왜 재작년부턴가 점점 더 그렇게 여행을 힘들어하셨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여행대신 카페 투어 더 많이 하기 시작했었고. 만나면 식사하고 경치 보며 드라이브 살짝 하고, 예쁜 카페 가서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근데 이제는 카페에도 오래 못 앉아계신다니까. 하루하루가 달라. 게다가 내가 혼자 운전해야 하다 보니 졸음운전 겁나서 나도 멀리 모시고 어디 갈 엄두가 안나. 내가 잠을 잘 못 자니까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몰려오면 운전이 정말 힘들더라고 여보.

그래서 이번에 우리 뭐 했는 줄 알아? 설에 엄마네 가서 며칠 동안 조금씩 준비하셨다는 떡국이랑 갈비랑 잡채랑 오징어 삶아 초고추장 찍어 먹고. 앉았다가 티브이로 영화 한 편 보고, 또 떡국이랑 갈비랑 잡채랑 오징어 먹고 집에 왔어. 이야기도 하다가 자꾸 끊어지고, 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데도 없거니와 바람은 또 어찌나 세게 불던지. 전국에 폭설 소식(우리 동네는 안 와. 알지? 여긴 정말 안와)에 날이 추웠거든. 그러니 내가 지난 일들이 안 떠오르겠어? 기록이 기억이 되는 건데 기록이 없으니.... 이제 정말 기록을 꼭 남겨야지 하며 첫 번째로 기록한 게 엄마 아버지 못 가시겠다고 하셔서 아이들과 우리 네 식구만 진짜 난생처음으로 여행했던 작년 11월의 제주도 여행이었는데. 시작이 끝이 됐네. 더 많이 좀 기록해 둘걸.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냥 이렇게라도 당신한테 수다 떠니 좀 나은 것 같아. 블로그에 비공개로 일기도 쓰고 있어. 당신한테 잡다하게 이야기했던 것들 그렇게 쓰면서 말하고 있지. 죽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나 보려고. 그리고 당신한테 가서 잊지 않고 있었던 일 다 이야기해 주려고 말이야. 잘 기록해 볼게 여보. 다 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이 더 잘 기억해 두려나. 그럼 잘 지켜봐. 내가 뭐 빼먹는 것 있으면 당신이 기억을 소환해 주길 기대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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