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요즘 차 없어도 되고 좀 일찍 마치는 날에는 차를 안 가지고 출근하고 있어.
기껏 3000 보도 안 되는 거리더라고. 몸이 너무 많이 망가져서 조금이라도 걸어보려고. 차 기름도 좀 아끼고.
처음엔 엄두가 안나서 차 두고 나서서 주차장 지나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를 몇 번씩 반복한 날도 있었어. 엇. 오늘은 바람이 많이부네. 엇. 오늘 너무 추운가. 이러면서 포기하기를 여러 번 하다가 용기를 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렇게 멀지가 않은거야. 얼마나 안걸었는지... 조금 더 빨리 경쾌하게 걷고 싶은데 고관절도 아프고 다리도 세상에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더라고. 눈물은 나고 볼은 시리고 등은 뜨겁고 하니 너무 힘들고. 그래서 이러고 어떻게 걸어다니겠나 했는데 몇 번 안 해 봤는데도 조금은 빨라지는 것 같고 차를 안 가져오니 주차할 걱정도 없어 편해.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건 파이지만.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신이랑 산책도 가끔은 했었던 그 길을 내가 걸어 다니는 거거든.
언제였더라. 공휴일이었는데 당신이랑 아침 일찍 나와서 강변을 건너서 대평그린빌이랑 협성까지 구경 다니고 우리도 거기로 언젠가 이사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나누며 슬슬 걸어 다녔던 그날이. 나는, 그 날이 그렇게 안 잊히더라고. 가끔씩 그날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햇살도 좋고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언제 한번 다시 그 길을 당신이랑 걸어야지 했었어..... 그런 말을 해 볼 새도 없었네...
이제는 기회도 없고.
며칠 전 아침에 출근하면서 본 건데 보여줄게
어때?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지? 중간에 돌을 길게 박아 넣어서 안전하게 건널 수가 있더라고. 근데 알고 보니 이건 자전거를 위한 배려였어. 어떤 꼬맹이가 자전거를 끌고 지나는 걸 보고 아하! 했네. 아무튼 참 좋아졌다. 위로도 다리를 놓았어. 차도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걸어서 건너는 다리 있잖아. 당신도 그건 봤었던 거야. 건너봤을 수도 있겠다. 나는 처음인 것 같아. 그렇게 걸어서 거길 건너보는 건. 차도를 따라 걸으면 사람들은 더 많이 볼 수 있고 안전한 느낌은 있지만 좀 더 많이 걸어야 하고.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좀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 근데 역시 돌다리가 최고인 것 같아. 이제는 딱 정했어. 봐바. 집에서 나와 일단 골목을 좀 빠져 나오면 중앙교회가 나오잖아. 거기 지나서 강변을 따라 걷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거든. 두 군데가 있는데 두번째로 가. 그러면 돌다리가 가까워. 거기를 건너. 맞은 편에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분이 오면 그 세로로 연결해 놓은 돌길을 양보하고, 나보다 어려보인다 싶으면 내가 그 돌로 건너가. 막 작정한 건 아닌데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됐어. 돌과 돌사이로 흐르는 천의 물소리가 아주 활기차. 물은 많지 않던데... 정말 많이 가물었어. 활기찬 소리들과 더불어 바람도 발등을 타고 올라오더라고. 춥지만 그 서늘함과 신선한 공기가 소풍 나온 기분을 잠깐 느끼게 하는 것 같아. 예쁜 새들도 볼 수 있고. 그리고 건너서 쭉 내려가다보면 초등학교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잖아. 거기로 올라와서 학교 담을 지나 우리 처음 이동네 왔을 때 살던 동네를 지나면 내 교실이 나와. 집에 갈때는 그 반대로 천천히 걷는거지.
이것 좀 봐바. 나를 멈추게 하더라고. 얘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동동 떠다니며 먹이를 찾고 곤두박이칠 치며 엉덩이를 치켜들고 너무 귀엽더라 여보.
하얀 저 새들도 여러 마리가 모여있었어. 그 사진을 못 찍었네. 진짜 많이 모여있었어. 와 이렇게 많은 새들이 여기에 있었다고. 신기하기도 하고. 다 같이 푸더덕 날아오르니 위협적이기까지 해서. 좀 무서웠어. 나는...
이런 친구들이 조용히 자기 삶을 살고 있었구나.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었구나.
조용히 살아야겠구나.
성실히 살아야겠구나.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숨이 끊어지면 가는 거지.
그런 저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학원에 들어오면 청소기부터 돌려.
예전 같았으면 여보 나 너무 피곤해. 방학이라 특강까지 하려니 더 피곤하다고. 당신이 같이 가서 청소 좀 해주면 안 되나? 여보 쓰레기 버릴 것 천지야. 페트병도 쌓였고.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는데... 하면 당신이 와서 해 주는데. 아휴. 조를 데가 없으니 아예 요새는 딱 맘 접고 이건 내 일이다 하고 있어. 여기저기 몸이 아파도 뭐 다 하긴 하더라고. 닥치면 다 한다고... 걸어오니 일단 들어왔을 때 춥지가 않아. 등에서 땀이 막 나니까 옷을 벗고, 히터 틀지 않고 청소를 먼저 할 수가 있어 좋더라고.
내가 언제 걷고 안걸었지? 기억도 안 난다. 아마도 당신 가기 한 달 반쯤 전이었나. 23년도 11월 말에 수능시험에 찌든 아들내미 위로도 해줄 겸 제주도 갔었잖아. 그때 올레길 걸었던 게 마지막이었지 싶어. 그 때도 분위기에 취해 막 앞장서서 걷다가 갑자기 태엽 풀린 인형처럼 멈춰서버렸었잖아. 그래도 걷기의 즐거움을 확실히 느꼈던 날이었어.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내 눈에 보이는 눈앞의 장면이 서서히 변하는 게 너무 좋았거든. 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휘~익 지나잖아. 아주 천천히 비디오 돌리는 기분이랄까. 엄마 아버지랑 주로 함께 다녔어서 그렇게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을 해본 적이 없었더라고. 너무 좋았어. 그렇게 느린 풍경의 변화가.
여보, 다음 결혼 기념일에 올레길 어때? 같이 가자. 큰애도 이제는 제 길 찾아 가고, 둘째는 뭐 어차피 고3이라 그냥 두면 되니 우리 둘이만 가는 것 어때? 함께 걷고 예쁜 카페에 앉아 쉬면서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고 그러자. 우리 결혼 20주년도 못했잖아.
그러고 왔는데 그 뒤로 한달 반도 안돼서 당신 급하게 그렇게 가버리고, 나는 그 뒤로는 진짜 의자랑 한 몸으로 살았지. 잠도 진짜 형식만 갖춰 누웠다 일어났다 한 것 같아. 자려고 누웠을 때가 제일 당신의 빈자리가 크더라고. 늦게까지 수업준비하고 자려고 누우면 옆에서 드르렁드르렁 크게 코 고는 당신이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코를 잡아 버리거나 얼굴을 돌려 버리거나 그런 식으로 혼자 그렇게 쿨쿨 잠든 게 얄미워 자는 걸 깨우기도 했었는데... 음냐음냐 다시 잠이 들어 버리는 당신의 팔을 잡거나 등에 손을 대고 자면 그렇게 잠이 잘 왔었는데... 특히 무서운 꿈을 꾸다 깨거나 뭔가 불안한 일이 있을 땐 그게 아주 직방이라 다른 약이 필요 없었는데...
이사하면서 나는 제일 작은 방에 책상을 두 개나 붙여놓고 작은 침대 있잖아. 우리 둘째녀석 쓰던 거. 그걸 내가 써. 벽에 딱 붙어서 돌아누우면 떨어질 것 같은 작은 침대. 좁은 게 낫겠더라고.
새벽예배 가야 할 땐 그리도 졸리더니 당신 없으니 새벽에 왜 이렇게 잘 깨는지. 그래서 되도록 일찍 자려고 하는데 그것도 잘 안돼.
걷기 시작한 이래 늘 참 많이도 걸었었는데, 그걸 또 안하다 하려니 어렵잖아. 그런데 당신 없이 혼자 하는 건 안 해본 건데 당연히 어려운 것이겠지?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지겠지? 여보? 그래도 가끔은 당신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도 하고, 막 다 내가 할 수 있다 어쩌구 하면서 이것도 하겠다 저것도 하겠다 호기도 부려보고, 당신한테 엄살도 떨어보고 싶다. 쓸데없는 이야기도, 호기도, 엄살도 아무 데도 해 볼 수가 없어 답답해. 당신이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