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정거장, 페루 쿠스코(Cusco)
1주일, 10일 정도의 여행에선 부지런히 다니는 게 남는 거라지만 1달 이상의 여행에선 적당한 속도조절이 필수적이다. 페루에 도착한 지 고작 4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고도는 내 몸을 천근만근으로 만들어버렸다. 본격적인 페루 여행에 앞서 컨디션 조절이 필요했고, 준비해야 할 것도 있어 하루는 잡다한 일들을 하며 쉬어가기로 맘먹었다. 환전도 하고, 빨래도 하고, 필요한 것도 좀 사고... 에고~ 온전히 쉬는 것도 쉽지 않구나.
여행 허가보다 어려운 택시비 흥정
이카 사막에서 모래 범벅이 된 옷을 세탁하기 위해 맡기고, 볼리비아 대사관을 찾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달리는 쿠스코는 구시가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드넓은 도로가 펼쳐지는 가운데 때때로 아파트도 보이고, 나지막한 건물은 구시가지보다 좀 더 개성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정돈된 모습에 놀라고 있을 즈음 대사관에 도착했다.
볼리비아 대사관이 있는 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차고까지 딸린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그야말로 고급진 동네 같았다. 그 가운데 하얀 대사관 건물과 무지갯빛 깃발은 단연 눈에 띄었다. 벨을 눌러 들어간 대사관엔 이미 많은 대기자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덕분에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에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비자발급에 대해 워낙 많은 말들이 있어 조금 긴장하며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신속하게 발급 처리가 진행됐다. 물론 서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기 전 몇 번이나 확인한 덕분에 별문제 없이 여행에 대한 허가를 얻어냈다. 기쁜 마음에 대사관 직원분과 기념촬영까지 한 뒤 대사관을 떠났다.
※ 비자발급의 가장 큰 공신은 무료 인쇄를 도와준 호스텔이었다. 인터넷으로 비자발급을 신청한 뒤 신청서를 반드시 인쇄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은근 많았다.
⇒ 비자발급 안내: https://moreworld.kr/1064
대사관에서의 거사를 마치고 볼리비아로 가는 버스 티켓을 예약하기 위해 터미널로 가던 길, 자신만만하던 택시기사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알 수 없는 골목길을 헤매다 설상가상 알 수 없는 어느 언덕으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울퉁불퉁 굴곡진 비탈길에 반쯤 허물어진 집들은 허물어지고 있는 중인지, 뼈대부터 새로 짓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우릴 팔아넘길 속셈인가 싶어 슬금슬금 겁이 나던 찰나, GPS지도와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 가까스로 큰길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즈음되면 미안할 만도 하건만 처음과 다를 것 없는 태도로 '길을 둘러왔으니 처음에 말했던 택시비보다 더 줘야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꾹꾹 눌러왔던 짜증이 터지며 서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택시기사는 자기 입장을, 우리는 우리 입장을 천명하며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다. 짧은 실랑이 끝에 택시기사가 먼저 '알았어, 그냥 가!'라고 하며 택시에 올라탔고, 우리는 아직 가시지 않은 감정을 삭히기 숨을 몰아쉬며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페루에서 택시 타기!
페루엔 정식으로 허가받은 택시와 일반 사람들이 운행하는 택시가 있다. 택시만의 고유 색이 없고, 여느 도시처럼 캡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초짜 여행객은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무척 힘들다. 더군다나 미터기가 있는 택시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구간은 흥정으로 값을 매긴다. 웬만한 거리는 3-5솔 정도에 다닐 수 있었는데 짐이 있거나 사람이 많으면 더 많은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요금은 택시가 출발하기 전 흥정을 해서 결정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정해진 택시 요금보다 큰 단위의 돈을 주면 간혹 잔돈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은 택시 강도! 혼자 탈 때는 운전기사 옆자리보다는 뒷좌석이 안전하며 때때로 짐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니 이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다. 이런 점들은 '이 나라가 이렇게 나빠! 무서운 곳이야!'라는 것보다 조심하면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중요한 팁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버스터미널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수많은 여행사에 깜짝 놀랐다. 몇 곳을 둘러본 후(차의 상태와 가격, 시간, 코스 등이 여행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일정을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해줄 차 편을 선택하여 표를 구입했고 며칠 후 다시 만나길 기약했다.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쿠스코의 두 시장
바쁜 일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점심을 먹고 쿠스코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산 페드로 시장Mercado San Pedro으로 갔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10여분을 걸어가는 동안 점점 더 페루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 페드로 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재미 삼아 슬쩍 둘러볼 요량으로 갔는데 골목마다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입구를 들어설 때 한 할머니가 손을 잡아끌어 바라봤더니 에그머니, 꾸이Cuy(기니피그)*닷. 대략 난감, 이럴 땐 어떤 표정을 해야 하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인사를 나눈 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네 재래시장처럼 의류용품을 파는 곳, 식료품을 파는 곳, 생필품을 파는 곳, 먹거리를 파는 곳이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정돈되어 있었다.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물체가 널려있어 기함하기도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들이기에 쉴 새 없이 눈이 돌아간다.
* 꾸이(기니피그)는 안데스 지역에서 사육하는 식용 쥐, 이 지역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전통 먹거리
산 페드로 시장은 현지인들의 이용이 많아 아르마스 광장 주변의 상점보다 가격이 좀 더 저렴하다. 더구나 장기 여행자들에겐 기념품보다 생필품이 더 유용하기 때문에 싸고 다양한 물건이 많은 산 페드로 시장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화려한 색의 과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비타민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고, 밤낮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온에 대비한 스웨터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처음 보는 과일에 관심을 보이니 '진짜 달다'며 한 조각을 잘라준다. 재래시장의 진면목은 세계 어디를 가든 '정스러움'인가 보다.
무엇보다 가장 유용했던 건 고산증에 효과가 있다는 코카잎이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 바로 코카차다. 티백으로 된 코카차나 코카잎을 그대로 우려먹어도 되고, 좀 더 빠른 효과를 보고 싶다면 코카잎을 그대로 씹으면 된다. 여행자들은 주로 코카차로 즐기고, 현지인들은 코카잎을 씹어먹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코카 티백보다 코카잎이 쌌고, 더 신선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으로 코카잎 한 봉지를 샀다. 그 코카잎 덕분에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에 이르기까지 무사히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고산병
사람들이 몰려 살아가고 있는 도시들의 평균 고도는 평균 1,500~1,600m 정도인데 반해 남미의 많은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에 위치한다(2,000m 이상 고도에 있는 도시를 고산도시라 한다). 쿠스코 3,400m, 라파스 3,640m, 푸노 3,819m, 마추픽추가 2,430m다. 후지산 정상이 3,776m임을 감안하면 남미의 도시들이 얼마나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고산지역의 저기압과 저산소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구토, 두통, 어지러움, 설사, 식욕감퇴, 부종(커피 티백마저 터질 듯 빵빵해졌다), 몸살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힘이 쭈욱~ 빠지고 숨을 들이쉬는 것이 쉽지 않고, 손가락이 터질 듯 부어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증상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산소 소비가 많은 사람일수록 고산병 증상을 많이 보이는데 이럴 땐 내 몸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밖엔 없다. 소로치 필스Sorojchi Pills라는 고산병 약을 파는데 플라시보 효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겐 육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뛰지 말고 천천히 걷고, 술을 먹지 말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코카 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예상보다 긴 시간을 산 페드로 시장에서 보낸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또 다른 모습을 한 시장에서 발을 멈췄다. 일명 '공정 공예 시장 산 프란시스코Feria Artesanal de Productore San Francisco'라는 곳인데 옷이나 모자, 가방, 스카프, 인형 등의 공예품을 특성화하여 전시·판매하고 있다. 현지인들 보다는 관광객들이 많고, 간혹 소상인이 물건을 떼 가는 것도 볼 수 있다.
산 페드로 시장보다 공예품에 있어서는 훨씬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있고, 품질도 조금은 더 좋아 보인다. 가격 면에서는 큰 차이는 없지만 때때로 비싼 것도 눈에 띈다. 물건이 너무 많아 고민된다고나 할까. 조금 개성 있는 물건을 구입하고 싶다면 산 페드로 시장보다는 산 프란시스코 시장으로 향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두 곳의 시장을 둘러보고 나니 조금은 더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마추픽추로 향하기 전 필요한 돈을 환전하고, 오전에 맡긴 빨래도 찾고,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여행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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