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정거장, 페루 와카치나
낯선 여행지에서의 출발
리마에서의 첫 밤이 지나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날,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리마의 교통체증은 소문만큼 대단했지만 악명높은 리마의 교통체증 보다 버스터미널을 가득채운 사람들의 무리가 더 인상적일만큼 터미널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생각보다 까탈스러운 탑승절차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더니 간식인지, 식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빵조각 2개를 나눠주고 건조한 페루 땅을 신나게 달렸다.
리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조한 땅이 창에 어린다. 어쩌면 '이카Ica'만이 아니라 페루땅 전체가 사막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메마름의 연속이다. 모래언덕 위 줄지어 심어놓은 키 작은 묘목을 보며 울창한 숲을 기대하는 동안 버스는 벌거벗은 붉은 산, 평평한 모래밭을 지나 어느새 커다란 모래산이 보이는 이카에 도착했다.
우리네 시골마을 같은 이카 버스정류장에서 열성적인 택시 드라이버를 만나 와카치나Huacachina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손바닥 만한 차 천정에 올려진 짐이 너무 버거워 보이지만 편한 이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도착했을 때 잃어버린 짐이 없기만을 바라며 와카치나로 향한다. 택시에 오르자 여행사 사장으로 돌변한 택시 드라이버는 와카치나에 가면 자신의 호스텔이 있고(수영장이 있는 호스텔이라 강조!), 버기투어와 샤워를 한 세트로 이용 가능하고, 가격까지 합리적이라며 자신있게 반복했다. 이카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과 만나 의논해본 후 결정하겠다는 말로 택시 드라이버의 입을 막고 나서야 창 밖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깊은 사막 속 오아시스엔 누가 살고 있나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목숨걸고 찾아야 할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곳에, 목숨걸고 찾지 않아도 마주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었다. 홀연히 사라지는 신기루 아닐까 불안에 떨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보았다. 다가가도 여전히 눈 앞에 있는걸 보니 신기루가 아닌 진짜~ 리얼 오아시스다.
와카치나는 화면을 통해 보았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만큼의 신비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면 철없는 여행자의 욕심일런지도 모른다. 일상에선 '좀 더 편하게, 쾌적하게, 화려하게'를 바라면서 여행지는 옛 모습 그대로 머물러주길 바란다. 이처럼 이기적인 여행자가 또 있을까.
와카치나는 케추아어로 '우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한 여인이 오아시스에서 목욕을 하다 외간 남성이 훔쳐보고 있는 걸 알고 부끄러움에 인어가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 때문이라는데 결론은 다르지만 어쩐지 '선녀와 나뭇꾼'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하면서 한적한 오후의 오아시스를 탐닉한다.
와카치나의 오아시스 주변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와 레스토랑이 대부분인데 대체로 깔끔하고 그럴듯한 곳들이 물가에 자리잡았고, 상대적으로 작고 저렴한 곳들은 모래산 위에 자리했다. 만약 '이 곳에 오아시스가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방울의 물이 그 어떤 보석보다 귀했을 사막에서 이처럼 큰 오아시스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할 곳이 아니었을까. 허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오아시스는 동화적 이미지를 위한 삽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 하다. 지금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는 오아시스를 위해 끊임없이 물을 채워야 한다는 슬픈 이야기에 조금 씁쓸한 마음을 안고 모래 위를 서성인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
다시 마을 안쪽으로 들어와 버기투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버기카 한대에 6-8명이 타고 사막을 오르내리다 적당한 언덕에서 내려주면 샌드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버기투어buggy tour다. 꽃청춘 이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국 여행자들로만 팀이 꾸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단다. 우리 역시 이카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던 한국 여행자들과 와카치나에서 다시 만나 한 팀이 되었다.
마을에 줄지어 서 있는 버기카는 주둥이를 삐죽 내밀고 코김을 품어내는 코뿔소 마냥 전투적으로 생겼다했는데 한 바퀴를 휘둘러보니 시스루 옷을 입은 듯 섹시해 보이기도 한다. 휑하니 드러난 차 안은 그 동안의 여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한 눈에 알아차리게 했다. 예고편 조차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니 버기 투어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갔다. 그러는 사이 건너편에 있는 버기카 한대가 요란한 엔진소리로 허세를 부렸다. 마치 '지금부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찔한 쾌감을 보여 주겠어. 준비됐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허세엔 허세로 응답하는 법!
"Let's Go! Right now!"
거친 굉음을 내며 커다란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모래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사막에 던져진 우리는 환호와 괴성을 번갈아가며 생애 첫 사막투어를 즐겼다. 그것도 잠시, 한 발 앞서 달렸던 다른 버기카 한 대가 모래에 빠져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맘씨 좋은 우리의 가이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코뿔소의 주둥이를 엉덩이에 바짝 갖다 댔다. 한 번의 공회전으로 심호흡을 하고 온 힘을 다해 밀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코뿔소에서 내려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은 손인사를 남긴 뒤 유유히 사막으로 사라졌다.
그때부터 우리의 코뿔소는 바람이 만들어 놓은 무질서한 모래 언덕 위를 신나게 휘달렸다. 롤러코스터처럼 천천히 언덕을 오르다 급강화를 하고, 오른쪽 왼쪽 예고 없이 요동치다 급정거, 당최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다. 눈, 코, 입,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들어오는 사막의 모래는 둘째치고 몸이 차 밖으로 팅겨나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한바탕 혼을 빼놓은 후에야 언덕 위 어딘가에 내려주고 기념촬영을 하란다.
그래도 좋다고 사람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아름다운 전경을 찾기에 바쁘다. 아무리 찾아봐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뿐인데 이상하게 모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엘리스처럼 현실적 감각없이 셔터만 마구 눌러댄다.
드디어 사막투어의 하이라이트, 샌드보드 라이딩!
'스키보드 한번 타보지 못한 초보 라이더가 과연 이 모래밭을 견뎌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잠시, 보드라고는 처음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여기까지 와서 움츠리고만 있을거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심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모하기도 한 나는 튼튼하면서도 가장 잘 미끄러질듯한 두툼한 나무보드를 골라 모래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한명, 두명 차례로 내려가면서 넘어지는 사람, 뒹구는 사람, 멋진 슬라이딩을 보여주는 사람 가지각색이다. 머릿 속으로는 보드 위에 서서 바람에 머릿결을 휘날리며 멋지게 내려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행자들은 스피드를 통한 쾌감을 추구하지만 가이드는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이다. 보드 바닥을 돌로 문지른 후 제대로 자세를 잡고 나서야 힘껏 밀어 라이딩을 완성시킨다. 출발 후 보드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손끝에서 심장까지 찌릿한 전기가 흐르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전율한다. 한번 터져나온 탄성은 끊일줄 모른다. '한번만 타 볼래'했던 마음은 샌드보드에 중독된 채 자꾸만 언덕 위로 향한다.
샌드보딩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코스로 오아시스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배기로 갔다. 좀 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저마다 오아시스를 내려다보며 감상에 잠겼다. 서로가 가진 생각은 다를지언정 오늘 하루가 정말 행복했다는 마음은 다를지 않을 듯 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우리의 만남을 소중히 담아두려는 간절함이 와카치나 사막을 따뜻하게 감싼다.
와카치나 마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막 위 모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깨끗히 샤워를 하고, 또 다른 모습의 와카치나를 만난다. 하지만 내게 가장 아름다운 와카치나는 빛나는 모래알이 가득한 새하얀 사막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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