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해명
“혹시 용서의 뜻을 가진 꽃이 있어요?”
남자분들의 문의 중 은근히 자주 듣는 질문이다.
대부분은 “여자친구에게 조금 잘못한 게 있어서요…”라는
조금 애매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실은 딱 그 뜻을 가진 꽃이 있긴 하다.
보라색 히야신스. 꽃말이 ‘용서’다.
어느 날 급한 목소리로 그 꽃이 있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제철이 아니어서 없다고 했더니,
전화기 너머로 땅이 꺼지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이렇게나 큰일인 걸 보니
참 좋을 때구나,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분이 전화를 하던 곳 근처엔 꽃집이 꽤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결국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면서
내게 ‘미션’을 넘겨버린다.
그동안 꽃다발을 여러 번 했던 젊은 남자분이다.
그는 내가 항상 손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곧바로 여자친구 집으로 직접 간다고 하길래,
나는 베이스 꽃병을 권했다.
처음이라는 신선함과 오래 남는 형태,
눈에 자주 닿는 위치에 놓일 수 있도록.
‘사랑의 방문’이라는 하늘빛 꽃도 살짝 담았다.
이럴 때 쓰는 치트키 같은 꽃이다.
꽃을 만드는 내 손길에 정성이 가득 실렸다.
그 사람의 사과가 잘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히 말하면, 내 작업 하나에도 이 정도의 정성을 기울이는데
직접 사과하는 당사자는 얼마나 더 마음을 써야 할까~
그런 얘기를 해드리고 싶기도 했다.
결국 단골이라는 친분의 힘을 빌려
“그래도 해명이 먼저일 것 같아요, 여자분에겐”
이라고 슬쩍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너무나 반가워하며, 좀 더 팁을 달라고 했다.
혹시나 오버한 게 아닐까 속으로 조마조마하던 터라 그 말이 너무 반가웠다.
내친김에 "그다음은 사과요, 그리고 그다음에 꽃이요!"라고 말해버렸다.
이런! 내가 돈을 받고 꽃을 팔았는데,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다섯 번쯤 하셨다.
들어올 땐 사색이던 얼굴이 반쯤 편해져서 나갔다.
그분의 진지한 표정과,
이렇게 물어오는 정성을 보니 잘하실 것 같았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예전에 한 친구는 내가 눈물까지 비쳤던 심각한 대화 끝에
다음 날, AI로 만든 ‘사과 그림’을 말 한마디 없이 톡으로 보냈다.
미안하다는 말을 그림으로 퉁친 것이다.
진심을 말로 꺼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를 산다.
‘미안해’, ‘잘못했어’라는 단순한 문장이
왜 이렇게들 어려울까.
사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낸다는 건,
자신의 민망함과 마주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과정을 꽃 같은 보조수단으로 퉁치고 싶어 한다.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이 먼저여야 한다고 믿는다.
정성만큼은 확실했던 그 남자 손님과의 대화 덕분에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꽃을 고르고 만들고 전하는 이 이 일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조금 더 진심에 닿도록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게 이 일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한창 열애 중인 아들에게 미리 말해주었다.
반드시 꽃보다 먼저 와야 하는 건, 해명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진정한 사과.
그래야 꽃이 제 역할을 다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