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위에 서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꽃을 꽂다가 문득 생각이 길어진 날이 있었다.
내가 관계에 대해 너무 집착하는 건가 싶다가도
아니다, 참을성 하나로 유지되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나~
스스로 마음을 접길 잘했다고 되뇌었다.
커다란 극락조꽃 두 대를 메인으로 한 작업이었다.
한 송이, 두 송이라고 부르기엔
존재감이 너무도 또렷한 꽃.
어울림을 위한 거리와 높낮이를 조심스레 잡으며 문득,
위에 있는 꽃이 더 중요한 걸까?
아래의 받침이 없다면, 저 극적인 꽃은 여전히 보기 좋을까?
위쪽 꽃 없이 아래쪽만 있으면 어떨까?
경력 13년 차에 꽃꽂이 이론에 나오는 구도를 모를 리 없건만,
순간 사람 사는 세상사가 그려졌다.
그리고 곧이어 어떤 사람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직급이 높아서 그런지
그는 다른 이의 조력을
자신의 ‘권위’에 합당한 의전처럼 여겼다.
모두들 묵묵히 그의 체면을 지켜주었고
그는 우리 동네가 참 좋다며 늘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같은 울타리 안에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공공연히 사람을 망신 주는 걸 거듭 보게 되면서
정말 경계를 모르고 가릴 게 없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결국 나는 마음을 접었다.
직접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힘들까?
나는 그런 장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친정엄마 탓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그러셨다.
“혼자 잘난 사람은 없어.
심지어 봉사하는 것도 상대가 있으니 가능한 거고,
보람을 얻으니 도움을 줄 때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
어릴 땐 그 말이 좀 과장스럽게 들렸지만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학생이 선생을 필요로 하듯,
선생도 학생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천하의 명가수도 관객 없인 공연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 내 꽃을 찾는 이가 있기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꽃을 만들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위에 감사의 말이 더해질 때가 있다.
“예쁘다”는 말,
“이 꽃 덕분에 위로받았다”는 말,
“덕분에 선물이 완성됐다”는 말.
때로는 꽃보다 비싼 선물을 받기도 한다.
이미 값을 치른 이들이
기꺼이 더 건네온 마음이었다.
누구는 그저 장사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난 나의 단골을
꽃으로 신의가 깊어진 ‘관계’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이 정성껏 고마움을 표현해 줄 때
나는 더 잘하고 싶었고,
그 마음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저 혼자 핀 꽃은 없다."
예전엔 시인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과 동떨어진 문장이라고 만 치부하기엔
그 말을 증명하는 장면들을 종종 보게 된다.
꽃을 꽂으며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에겐 ’ 대상’이 된다.
관계는 언제나 함께 피어나는 것이고
감사하지 않으면 균형이 무너진다는 걸.
간단히 꽃 몇 송이 만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사람 일이 아닌 게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