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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Apr 24. 2023

구두(수상록)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2014년

구두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게 내세울 게 없을까.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듯이 내 인생, 내 맘대로 살 수는 없다지만 무능력한 나를 보며 기초 공사를 처음부터 잘못한 내 탓이려니 자책을 해본다. 그러나 내 탓이 분명한 건 맞는데, 가끔은 가난한 부모님 탓, 남의 탓, 크게는 나라 탓을 하며 있는 대로 떼를 쓰기도 한다. 내 서른셋은 부실 공사로 지어진 건물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두려움으로 무의미한 하루가 빨리 가기만을 바라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마주한 내 모습은 마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메뚜기 같았다.

그날은 비가 많이도 내리던 날이었다. 기분까지 축 처져 땅바닥까지 늘어지는 몸뚱이를 이끌고 터벅터벅 가는데 구두까지 말썽이었다. 발바닥이 점점 축축해지는 걸 보니 이내 마음마저 축축해졌다.

생각해보니 한창 꾸미고 다닐 나이에도 비싼 구두를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었다. 신고 있던 구두 역시 ‘무조건 만 원’이라고 써 붙인 곳에서 사온 것이었으니까. 내가 걸고 끼고 입고 신는 모든 것을 내가 갖춘 능력 안에서 맞추어야 했다. 물론, 만 원짜리 구두일지라도 신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수명이 짧게 가기도 하고 길게 가기도 한다. 또 나는 워낙 많이 걷는 편이어서 남들보다 구두가 쉽게 닳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구두 모양 형태로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출근하는 거리에서 당황했지만, 회사까지는 신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착하게 떨어진 밑창을 일단 쓰레기통에 버리고 뼈대만 남은 구두를 질질 끌고 갔다. 회사 건물 내에 구두 수선 집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나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버스를 탔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구두 수선 가게 문을 열었다. 아버지 나이쯤 되는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나를 맞이했다. 나는 굽이 닳은 표정을 짓고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구두 밑창이 떨어졌어요.”

“근데 떨어진 밑창은 어디 있어?”

“떨어져서 오다가 그냥 버렸는데요?”

“아니 그걸 왜 버려!!! 들고 와야 고치지.”

호통같이 들렸지만, 호통이 아니었다. 장난기 가득한 아저씨의 말투와 표정이 재밌어서 나는 금세 축축했던 물기를 걷어내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밑창 버려도 고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저씨이. 어떻게 땜빵이라도 안 될까요?”

아저씨는 가게에 있는 여러 종류의 밑창들을 이렇게도 대보고 저렇게도 대보았지만 내 구두에 맞게 고치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환자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 의사의 심정처럼 느껴졌다. 이미 발은 비 때문에 완전히 젖어 있는 상태였고 퇴근 후 집에 갈 때가 걱정인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아저씨는 가망 없는 환자를 끝까지 살려보고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사이즈가 뭐야?”

“저 240이에요”

그러자 아저씨가 저쪽으로 가시더니 평소 신던 구두와는 다른, 왠지 고급스러워 보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내게 대뜸 신어보라고 하셨다.

“그래도 주인이 있는 건데 어떻게 신어요. 괜찮아요. 아저씨!”

“아가씨! 이따 집에 가야 하잖아. 손님 며칠 안 오시니깐 일단 이거라도 신고 가! 그리고 그건 버려!”

“그러다 손님이 갑자기 찾으러 오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내가 공장에 보냈다고 할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이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지.”

결국, 아저씨의 배려로 나는 다른 손님이 맡기고 간 구두를 신었다. 마음이 따뜻한 아저씨 덕분에 나의 퇴근길이 고급스러운 구두만큼이나 안전하겠다 싶어서 아저씨에게 감사했지만, 구두 주인 입장이라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슬며시 걱정되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구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늘 싸구려 구두를 손에 쥐고도 행운을 얻은 것 같이 기뻐하는 내 모습과 다르게 가죽부터가 다르고 신은 느낌조차 다른, 이 고급스러운 구두 주인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까? 나보다는 왠지 능력도 있어 보이고 높은 굽을 소화할 만큼의 다리맵시를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사람이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 구두를 신고 느린 걸음으로 좁은 현관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싸구려 구두처럼 밑창이 떨어져 나간 내 모습이 신분상승이라도 한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자 얼굴 없는 주인이 내게 가까이 와서 마치 고개를 끄덕끄덕 대답하는 것 같았다.

구두에 묻은 내 흔적을 지우고는 깔끔한 종이 봉투에 빌려 신은 구두를 넣었다. 그리고는 나의 퇴근길이 염려돼 어쩔 수 없이 ‘구두를 허락 없이 빌려 준’ 아저씨에게 줄 사탕 한 봉지도 챙겼다.

며칠 후, 나는 새 구두를 장만했다. 여전히 비싼 구두를 신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금방 닳지 않을 튼튼한 굽으로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서 골랐다.

어쩌면 인생도 구두와 많이 닮았다. 수많은 종류의 구두를 고르며 누군가는 고급스럽고 예쁜 구두를,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금방 닳고 쉽게 밑창이 뜯어지는 구두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구두든 싸구려 구두든 처음 산 새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건 똑같다는 것. 무엇이 가장 빠르게 닳고 느리게 닳을지는 어떻게 인생을 걷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어떤 인생이든 새 구두를 신고 처음 걷는 길이 상쾌하듯, 새 인생을 받아 사는 마음으로 예쁘게 신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와 나의 비밀은 둘만이 간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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