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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y 09. 2018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

그냥, 너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외갓집에 가면 늘 외로웠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언니들과 동생들 뿐이어서 같이 놀 또래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위의 사촌 언니 둘이 너무나 공부를 잘했기에 느끼는 박탈감이 컸다. 공부를 어느 정도로 잘했냐면, 내가 초등학교 때 고등학생이었던 큰 사촌언니의 고민은 어느 대학을 갈 수 있을지가 아닌 서울대의 어느 과를 들어갈지 였으니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범생이었지만 사촌언니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공부 말고는 딱히 다른 재능도 없어서 언니를 볼 때마다 위축되곤 했다. 가족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촌언니에게 가 있었고 나는 부러움과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웠다. 


 그날이 선명히 기억난다. 나는 거실의 모서리 벽, 움푹 파여있어서 누군가 고개를 돌리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무릎을 끌어 앉은 채 앉아있었다. 누군가 내가 없어진 걸 알아주기를, 어디 불편하냐고 물어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지나가던 엄마가 나를 발견했다. 엄마는 '쭈그려 앉아서 뭐하는 짓이야! 나와!'라고 외쳤다. 그 뒤로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봐주기를 바랐는데 - 예를 들면 왜 거기에 있었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같은 질문들 - 엄마는 나를 째려보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러 떠났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어쩐지 나는 늘 부끄러웠다. 숨을 거면 제대로 숨던가, 엄마에게 솔직하게 불편하다고 말하던가. 그 어느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숨어있던 그때의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매 순간 제대로 말하지도, 도망가지도 못한 채 어느 집단에서든 한 발짝 빠져나와 서성이는 사람으로 자랄 줄은 정말 몰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 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발췌- 


 김애란 소설가의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주인공인 미영은 그날 자신을 발견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 그날 이후 미영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직장 동료에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의 부재를 알아주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미영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 동아리에서 발표를 했었다. 동아리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기분 상한 내색을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기분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품은 채 뒤풀이에서 살짝 빠져나와 혼자 동아리방을 향했다. 20분 정도 흘렀지만 역시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찾는 연락조차 없었다. 나는 그만 객기 부려야겠다 하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한 선배가 들어왔다. 내가 기대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평소에 나랑 말도 별로 안 했던 선배였기에 나는 퉁명스럽게 왜 왔냐고 물었다. 선배는 답했다.


"그냥, 너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어릴 적 집 앞에 공원이 있었다. 그 공원의 미끄럼틀은 유난히 길고 무서웠다.  7살 때 그 미끄럼틀을 타다가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아 이러다가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로 시작해서 '우리 가족이 죽으면 어떡하지'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나는 죽기 않기로 결심했다. 아직 세상에 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이 너무 슬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근 계속 방황하고 취업에 실패하면서, 나는 7살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은 내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고,  이 사회에 내가 필요한지 모르고,  가족이 슬퍼할 것 같지만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는걸 과 같은 푸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읽었고, 어릴 적 외갓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고, 나의 부재를 알아주었던 그 선배가 떠올랐다. 내 부재를 알아주었던 고마운 사람. 조금 힘이 났다.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떠올리니,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지만 글이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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