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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Oct 21. 2018

학교에 무료 콘돔 박스가 생겼다

#3

 


학교 로비 한가운데에 

노랗고 예쁜 콘돔 박스가 생겼다. 


파랗고 노란 콘돔을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콘돔 일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우와! 누가 비타민C 기증했나 보다! 하면서 달려갔다. 북유럽이 성에 개방적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콘돔을 학교에서 가장 붐비는 곳에 두다니 신기했다. 무료지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한 번에 많이 가져가지는 말라는 친절한 설명을 읽고 슬쩍 2개를 방으로 가져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선생님이 가져다 놓은 박스였다. 2달이 지난 지금도 박스는 그 자리에 있고 콘돔이 다 떨어졌다 싶으면 누군가 귀신같이 채워놓는다. 박스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놀랐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학생회의 시간에  누군가 콘돔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고 퀄리티가 낮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격한 공감을 받은 거다. 


나는 그냥 웃고 넘길 줄 알았는데 선생님들이 이 안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깜짝 놀랐다. 학교 측은 이미 다양한 사이즈에 콘돔을 지난 학기에 구매했으니, 이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제공할 건지(무료/판매) 학생회에서 결정하라는 친절한 답변까지 제시했다. 




덴마크에서 온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많은 고등학교가 무료 콘돔 박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Only with condom"이라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한 기관이 고등학교에 무료 콘돔 박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한 친구는 파티룸 입장 문 옆에 항상 그 박스가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나: 친구들이 보는데서 콘돔을 편하게 집어 갈 수 있었어?
덴마크 친구: 혼자 가져와야 했다면 조금 뻘쭘했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가서 집어오는 건 전혀 부끄럽지 않았어
나: 만약 네가 집어가는 걸 누군가 보고 소문을 낸다거나 하는 건? 
덴마크 친구: 전혀! 근데 여자애들 대부분은 경구 피임약을 먹고, 남자들이 콘돔을 챙겨서 여자애들이 챙기는 것보다는 남자애들이 챙기는 경우가 많긴 했지. 


 지난해 12월 서울시는 놀라운 계획을 발표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무려 고등학교에 콘돔 자판기(!) 운영하겠다는 계획이었다.(링크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청소년의 성에 대해 폐쇄적인 사회에서 누가 당당하게 콘돔 자판기를 이용할 수 있을까? 누군가 콘돔 자판기를 이용하는 모습을 본다면 온 학교에 금세 소문이 날 게 분명한데? 게다가 콘돔 구매자가 여성이라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항상 순결해야 하는 여학생이 콘돔을 산다니!! 


사회적기업 인스팅터스가 청소년 성권리를 위해 광주에 설치한 청소년용 콘돔자판기 @연합뉴스 


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그대로 대학생이 된다. 

만약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학교에 무료 콘돔 박스가 있었다면 나는 결코 그 근처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콘돔을 가져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 나는 '몸을 굴리는 쉬운 년' 될게 분명하니까. 


콘돔에 대한 접근성도 보다 더 큰 문제는 성을 금기시하는 문화다.

 내가 지금 있는 학교에서 쉽게 콘돔을 가져올 수 있었던 건, 그리고 학생들이 콘돔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다는 실질적인 불만을 제기할 수 있었던 건 이런 행동들이 건강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덕분이었다.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건강한 성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공통된 믿음이 비아시아인 학생들에게는 존재했다. 




그렇다고 학교가 

자유로운 성 생활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동시에 성관계에서 "동의"의 중요성을 매번 강조한다. 학기 첫날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섹스는 tea consent와 같다는 비디오를 보았다. 비디오 내용을 몇 개 소개하자면


A: 나랑 차를 마실래?
B: 음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 A는 우선 차를 끓일 수 있지만, 차를 끓인 후에도 B가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있다. 이때 A는 자기가 차를 끓였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B에게 차를 마시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A: 나랑 차 마실래?
 B: 아니 나 차 마시고 싶지 않아 -
> 차 마시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차 먹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섹스하기 싫다는 상대방에게 왜 섹스하기 싫으냐고 화내면 안 된다. 


학교는 학기 첫날 이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섹스는 범죄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 이후로 학교는 학생들의 성생활에 대해서 그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한국 청소년의 피임 실천율이 

51.9% 밖에 되지 않는다


는 사실 (링크)을 젠더 수업에서 이야기했을 때 황당해하던 다른 나라 학생들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정말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게 단지 청소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문제라는 걸 알기에 더 슬펐다. 실질적인 성교육과 섹스를 금기시하는 문화를 재정립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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