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릴 Oct 28. 2018

스물여섯,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

#4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의존하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단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항상 가난했습니다. 여성에게는 아테네의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p168

 

한국에서 내 방은 문 잠그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던 부모님 때문에 항상 문이 열려 있어야 했다. 게다가 한쪽 벽면은 거실 베란다와 마주하고 있어서 베란다에 쌀을 꺼내러 갔던 동생이 쉽게 창문을 열기도 했다. 기본 방음 조차 되지 않는 오래된 아파트 속 그 작은 방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베란다와 맞닿아 있는 녹색 창문에 비쳤고, 내가 내는 모든 소리는 거실로 쉽게 새어나갔다.


 지금 나는 북유럽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돈이 없어서 싱글룸을 쓰지 못하고 더블룸을 신청했는데 룸메이트도 좋고 방의 위치도 좋다. 무엇보다 나는 이 방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와 호수를 사랑한다. 바람이 참 많이 부는 이 곳에서, 창가를 마주 보고 앉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공간을 나눠 쓰는 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상의 작은 불편함은 당연하고,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 밤에 룸메이트의 남자 고민을 들어주거나 재즈가 듣고 싶은 순간에도 룸메이트의 취향에 따라 하드락을 듣기도 해야 했다. 


 다음 주까지 학교가 중간 방학이어서 룸메이트는 10일간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어제 화장실과 샤워실을 나눠 쓰는 옆방 친구조차 애인과 싸우고 암스테르담을 가버리자 나는 철저히 이 공간에 혼자 남았다. 그들이 떠난 후 멍하니 창문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내 공간을 가지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가구 구조를 조금 내가 편한 대로 바꾸고 룸메이트의 물건을 곱게 한쪽에 잘 정리해 두었다. 1인분의 물건으로만 방은 훨씬 깨끗하고 넓어 보였다. 청소가 끝난 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를 벗었다. 한국에서는 아빠가 끔찍이도 딸들이 속옷만 입고 있는 걸 싫어해서 - 그러면서 본인은 4각 팬티 잘도 입고 다니셨지 - 항상 옷을 갖춰 입어야 했다. 여기에서도 룸메이트가 있다 보니 속옷만 입고 다니지 못했는데,  그들이 떠나자마자 나는 팬티만 입고 온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재즈음악, 아이유, 백예린, 김사월의 노래를 크게 틀었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팬티 바람으로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저녁에는 큰 종이를 꺼내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마구 적었다. 누가 보지 않을 테니 마음껏 적고 테이블 위에 크게 펼쳐놓았다. 평소에는 누가 볼까 봐 꼭 숨겨두었던 노트도 아무렇게나 펼쳐 놓았다. 나는 노래를 듣다가 노트북 앞에 앉아서 글을 쓰다가 눕다가를 반복했다. 


그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팝콘을 전자레인지에 튀겨서 방으로 가져왔다.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없이 늦은 밤 와그작 와그작 팝콘을 먹으며 배구를 보았다. 응원하는 배구팀의 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면서 나는 소리 내서 욕을 하거나 슬퍼했다. 그리고 새벽 1시에 샤워하기. 이건 정말 꼭 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누군가를 깨울까 봐 새벽 샤워를 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나는 어젯밤 오래도록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맨 몸으로 방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천천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크게 틀어 놓고 잠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교에 무료 콘돔 박스가 생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