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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Feb 11. 2019

파티가 끝나고 난 뒤



K에게


너라면 새벽 3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울어본 적이 있겠지. 

한국에서는 노란 술집의 조명 아래서 벌게진 얼굴로 막 웃고 떠들고 한숨 쉬던 얼굴들 모두 사라지고 혼자 남는 순간. 그리운 누군가에게 카톡을 쓰다 지우고, 주소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결국 그 모든 말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곤 했어.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친구 자전거 뒤에 앉아 학교로 돌아온 어젯밤, 거의 흑빛에 가까운 바다와 무수한 별들을 두고 나는 친구 몰래 울었어. 자전거의 나라 덴마크 답지. 여기 애들은 술 취해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더라. 


K,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잘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사랑은 그렇게 가벼울까.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느낌인데.  그가 말한  모든 맹세와 약속들은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두꺼운 안경을 추켜올리며 책 읽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낙으로 늙어갈 거라던, 그의 따듯한 약속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  



너와 내가 최고의 술친구가 된 건 어쩌면 그 사람 공이 컸을지도 몰라. 내가 첫 번째로 그 사람한테 차였을 때 너도 네 여자 친구한테 차여가지고 같이 술 엄청 마셨잖아. 게다가 둘 다 메일로 이별 통보받아 동질감도 컸지. 연희동 중국집에서 다오 큰 거 1병이랑 연태고량주 중자 하나 먼저 주세요.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아 새벽 2시까지 마시곤 했어. 메일로 이별 통보하는 건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요새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누가 싫은 지 얘기하다 보면 서로를 욕하게 돼서 소리 지르면서 싸우다가도,  집에 갈 때면 서로 잘 들어갔는지 꼭 확인했지.  


어젯밤은 정말 이상했어. 같이 일하는 직원 분들 중 하나가 나를 좋아한다고 지난주 내내 주변 분들이 난리였어. 그래서 그 사람과 키스하고 싶었어. 어떤 느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키스가 하고 싶었어.  그 남자가 자기 아파트로 나랑 매니저분을 초대해서 1차로 그분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는 학교 카페에서 춤추면서 보드카 마시고, 3차로 근처 바에 갔어. 바에는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이 가득했는데, 거기서 내가 그 사람한테 말했어. 


어젯밤의 흔적


나도 네가 예쁘다고 생각해. 우리 나가서 키스할래?


그러자 그는 우리는 일하는 사이여서 안된다고 말했고, 나는 도대체 뭐가 무섭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여자를 무서워한다고 말하는 거야. 이 상황은 뭐지? 하면서 좀 보채다가 포기하고 춤을 췄지. 근데 어떤 남자 학생이 내 옆으로 오더니 나를 좋아한데. 그리고 다른 남자애도 나를 좋아한데. 그 순간 깨달았어. 


정말 엉망이구나 지금.


나를 진지한 마음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무섭더라고. 나에게 전혀 상처 안 받을 가벼운 사람과는 키스하고 싶지만, 나를 좋아해 왔다고 말하는 이 18살 남자애와는 키스하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그 남자애들이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일지로 몰라. 하지만 그 남자 직원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는걸. 나는 모르겠어. 


결국 그 남자 직원은 다른 학교 여자애랑 잤고, 

나는 4차로 다른 학교 파티에 갔다가 넘어져서 머리에 혹을 달고 돌아왔어.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침은 항상 최악이야. 

내가 어쩌자고 키스하자고 했을 까. 왜 넘어져가지고 머리는 욱신거리는 걸까.  내일 그 직원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할까 -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아니니? 나 좋아한다고 난리 치다가 키스 안 하고 다른 여자랑 잔 건 뭐야? - 나한테 고백한 남자애 얼굴은 어떻게 보지. 숙취에 머리는 아프고 배는 고픈데 여기는 국물요리가 없는 덴마크. 결국 아껴두었던 신라면 하나에 날계란을 풀어 먹었어. 그랬더니 살 것 같더라. 


언젠가 너에게 왜 이렇게 취하도록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물어봤을 때, 너에게 술은 일종의 부활이라고 했지. 나 소진해버리고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고. 어쩌면 파티에서는 엉크러져 있던 마음들이 폭발하고, 다음날 남은 건 볼썽사 다운 재밖에 없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 파티가 이젠 지겨워. 나는 편한 친구들과 도란도란 맛있는 음식과 술 마시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내가 한국에 일찍 돌아간다면, 그건 네가 해주는 맛있는 요리에 비싼 술을 먹기 위해서인 거 알지.

웃긴 이야기 많이 만들어 갈게. 기다려라. 


- 파티가 끝난 다음날에. 덴마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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