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yado sapporo 게스트 하우스의 요시에상 이야기.
27살 처음 왔던 일본. 아직도 기억나는 건 로프트 백화점에서 계산이 끝난 봉투를 (내가 바로잡기 편하게끔) 손잡이 방향으로 돌려줬던 점원의 태도다. 그런 식의 아주 섬세한 배려 몇 가지로 일본을 좋아하게 됐고 지금 까지 취미처럼 이어오는 일본어 공부는 여행 온 순간에 한 번씩 써먹으며 자가 검진을 해보는데, 어쩐지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것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찬물 주세요, 다른 건 없어요? 그런 말이 아니라 오늘 내 하루는 어땠는데, 넌 어땠어? ㅡ 그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구글 평점이 4.9 인 [Oyado sapporo]라는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숙소 여러 곳을 뒤져봐도 이렇게 평점 높은 곳은 못 봤는데. 게스트 하우스 특유의 불편함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평점이라면 가봐야지 싶었다.
혼성타입 / 여성전용 타입으로 나눠진 룸. 나는 여성 전용룸으로 예약했다.
그렇게 편해 보이지 않는 침대 프레임과 갈색 매트리스 시트가 조금 맘에 걸렸지만..
비수기의 삿포로는 어두워지면 질수록 ‘왜 이 시즌에는사람들이 안 오는지 알려줄게~’ 라고 부연 설명이라도 해대는 듯 낮보다 더 축축하고 차가운 퍼런 얼굴을 숙 들이민다. 길 양쪽으로 몰아둔 처치 곤란의 눈이 아스팔트 먼지와 섞여 천천히 녹으면서 도보든 차도든 움푹한 물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신발은 물론 바지 밑단까지 젖어 발이 무거워지는데 무엇보다 바닥 표면에 비치는 물 그림자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든다.
oyado sapporo.
삿포로 역에서 일곱 정거장을 지나 '미나미히라기시조'역에 내리면 도보 7분 거리에 있다.
홋카이도 삼대장 삿포로/오도리/스스키노 역을 벗어나면 급격히 동네가 한산해지고 이 동네에 쓸 가로등을 모두 다 삿포로에 갖다 바쳤나 싶을 정도로 동네에 불빛이 없다. 덜그럭 대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유독 더 요란히 퍼지고. 텅 빈 거리에 한 두 명씩 사람이 서 있으면 그게 더 무섭다. 눈썹이 까맣고 M자 이마의 전형적 일본 아저씨가 장을 본 봉투를 들고 뒤를 따라왔다. '장을 봤다는 건 정상적인 가정이 있다는 거겠지? 아니면 저건 날 안심시키기 위한 훼이큰가?' 혼자 있으니 무서워서 별별 상상을 다 하며 걸어왔다.
도착.
로비엔 아무도 없는데 덩그러니 켜져 있는 불. 아직까지 안 들어온 나를 누군가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던 oyado sapporo의 첫인상.
캐리어 하나 고작 들어갈 작은 입구와 몇 달 전만 해도 연신 쌓인 눈을 퍼냈을 제설용 빗자루 두 개.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나에게 인사해 주겠지. 반갑다고. 잘 왔다고 웃어 주겠지. 아. 지난 이틀간 타인과의 소통이라곤 "~해주세요" 식의 일방적 지저귐이 다였던 뻐꾸기는 이제야 비로소 상호소통을. 대화를 하게 될 생각에 가슴이 뛴다. 대화라는 건 인간에게 이렇게나 !! 중요한 거였군요... 나는 이 날 사무치게.... 사무치게 알게됐다...
오카에리!
꼭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처럼 '짜랑'하고 들리던 요시에상의 첫인사. 아직까지 안 잤다니.. 나는 반가움과 쑥스러움 너무 늦게 체크인하는 미안함 등이 섞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키마시..타...라고 대답했다.
한국사람? 한국사람 맞지?
훅 들어온 반말에 놀랬지만. 그래 뭐 나보다는 많아 보이니까... 근데 방금 한국말! 한국말했잖아?!
오 맞아요! 한국말해요?
외국에서 듣는 모국어는 이렇게나 내적 경계심을 사정없이 풀어버리는 거였구나...나는 이 날 한국어의 소중함을 또 사무치게 알게됐다....
응 쪼금! 나 한국 오타쿠. 50번갔어!
노란색 비니에 발갛게 튼 연분홍빛 볼을 가진 요시에상의 얼굴을 보니 노란색과 분홍색은 서로 참 잘 어울리는 색깔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50번 넘게 여행했지만 한국어는 아직 서툴다고. 가끔 손님으로 한국인이 오면 대화하는 걸 즐긴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일본인과 대화하며 회화실력을 늘리고 싶던 참이었다고 하니 너무 잘됐다며. 가방만 풀고 얼른 로비로 내려와서 얘기해보지 않을래?라고 제안해 줬다. 얏따! 나 완전 번짓수 잘 찾아왔잖아?
캐리어를 3층까지 들고 올라가는데도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얼른 2층 침대에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갔다.
저녁 9시 반부터 시작됐던 우리의 대화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요시에상은. 너무나 친절한 요시에상은 대화 내내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처언-천히. 단어와 단어를 끊어가며 얘기해 주었고 그럼에도 이해를 못 할 때는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자신의 긴 긴 인생 스토리를 일본어로 얘기해 주었다.
여기부터는 요시에상의 얘기를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어 그녀의 말투 그대로를 빌어 써본다.
사실, 나는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꿈'이 없었던 건 아닌데 '꿈'은 그냥 '꿈'인 거잖아?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부 기관에 취업했어. 가족들이 나를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나도 꽤 오랫동안 그 일에 만족했던 것 같아. 하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누구도 확실하게 [예스, 노]라고 답하지 않는. 책임을 피하려는 상사들의 모습을 볼 때 너무 화가 났어. 이건 일본만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한국에서 처음 '시위'란 걸 보게 된 거야. 친구랑 청계천을 걷다가 음악 소리가 나길래 마츠리인 줄 알고 인파를 따라갔는데 그게 '시위' 였대. 나는 그때 정말 깜짝 놀랐어. 뉴스에서 보던 '데모' 모습이 아니던데?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내기 위해 개인 시간을 써서 모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쇼킹이었어. 일본에선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그 후로 회사에서 화를 더 자주 냈던 것 같아. '그래서 yes예요? no예요?' 정확한 답을 물을 때마다 동료들은 내가 심하다고 하더라. 그때 나는 언젠가는 이 회사를 관둬야겠다고 결정했어.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자. 지금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해야지 생각하고 4년을 준비한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이만 저 그만둘게요!라고 말했지. 사람들 다 놀라고 뭐? 네가? 거짓말! 하는 분위기였어. 나는 20년 넘게 근무한 장기근속자였거든.
- 진짜? 완전 멋있네요! 4년 동안 준비한 계획성도 멋있지만 그걸 진짜 행동에 옮기기까지 쉽지 않았을 텐데.
맞아.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 그때는 처음 얻게 된 일을 평생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 20년 넘게 해온 일을 갑자기 관두는 나를 이해 못 했지. 원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 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 사실 일본은 조금 그런 게 있거든. 너도 알다시피 요즘 일본 화폐가 엄청 떨어졌잖아? 그들은 아직도 내가 관둘 때 받던 월급과 똑같은 급여를 받는대. 나도 처음부터 게스트하우스가 잘됐던 건 아니지만 시간이 쌓이고 한 번 와준 손님들이 소문 내주고 또 다른 사람이 와주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와 주니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방금 수진상이 [일본사람이라서 좋아요?]라는 질문에 반은 안좋았고 반은 좋다! 하하하.
- 에 요시에 상도 yes인지 no 인지. 정확하게 말 안 하네! 하나만 골라야지!
아 그러면! yes!!! I am happy!!! 수진상도 한국사람이라서 좋지?
- 아...저는 일본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오 아니야!!!! 난 한국이 더 좋아. 나 한국 가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 나라의 칭찬만 하다 12시가 다 돼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3일 만에 나눠보는 대화라 내가 너무 들떴을지도. 눈치 없게 요시에상의 시간을 뺏어버린 건 아닌지. 잠자리에 누워 아까 전의 상황을 천천히 천천히 되감기 해본다. 대화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내가 못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정말 민폐인데. I 특유의 소심기질이 발동되려 할 때 바깥에서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혼자 온 스페인 남자.
일본 올 때마다 여기를 들리는 듯. 반갑게 맞이하는 요시에상 목소리와 12시가 넘었는데도 또다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요시에상의 모습은 '워라벨'로는 설명이 안 되는 라이프였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얘기를 나눈 그 장면은. 어쩌면 과거 그녀의 머릿속으론 이미 상상해 본 적 있던 미래의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나의 오늘이 누군가에겐, 오래전 상상 속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에 신비로운 느낌을 느끼며.. 나도 나만 아는 상상을 조심히 펼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