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차, 길이 끝나면 또 다른 길이.
소망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매 순간을 견뎌내고 겪어내야 한다.
그냥, 건너뛸 수가 없다.
건너뛰어 지지도 않는다…….
산티아고를 이제 20여 km 앞두고 있다.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800km를 걸어야 한다는데, 과연 내가 다 걸을 수 있을지,
걷는다면 언제 끝마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연 내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결과를 막연하게 기대하고 시작한다.
소망하는 결과일 경우, 막연하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기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소망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매 순간을 견뎌내고 겪어내야 한다.
그냥, 건너뛸 수가 없다.
건너뛰어 지지도 않는다…….
물집이 난 발을 견뎌내고,
베드버그에 물려 온 옷가지와 침낭을 소독하는 소동을 벌이면서 가려움을 견뎌내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서로 배려해야 하고,
때론 지루한 길을 끝까지 걸어내야 한다.
중간에 알베르게가 없으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중간에 카페나 바가 없으면,
쉴만한 쉼터가 없으면,
우린 쉴 수도 없었다.
그저 또 걸어야 했다.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굶어야 했고,
중간에 샘터가 없으면
샘터가 나올 때까지 갈증을 참아가며 걸어야 했다.
그래서,
걷는 길에 친구가 있다.
먹을 것을 나누고,
물을 나누고,
나의 페이스에 맞춰주기도 하고,
그의 페이스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기어이 걷게 된다.
그래서 친구가 참 좋았다.
캐시와 잔과 함께 산티아고까지 갈 것 같다.
아니, 이제는 내가 꼭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반드시 이들과 함께 손 꼭 잡고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오늘 캐시가 화요일 저녁에 도착하도록 할 것인가,
수요일 오전에 도착하도록 할 것인가 페이스를 조절하자고 제안했을 때,
잔이 자기는 화요일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수요일에는 집으로 떠나야겠다면서.
그래야 10월에 있을 수업을 준비할 수 있겠다면서.
그래서 나는 바로 거기에 동의했다.
화요일 저녁이든 수요일 오전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우리들이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로 내 마음이 그렇다.
오늘 새벽길을 걷는데 우연히 유리를 만났다.
서로가 너무나 깜짝 놀랐다.
깜깜한 새벽, 유리가 막 어느 알베르게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는지는 유리도, 우리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유리는 우리보다 좀 더 어려운 길을 천천히 돌아서 걸었던 것 같고,
우리는 마지막에 스퍼트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우린 또 만났고, 걷다가 중간에 잠시 헤어졌다.
오늘도 원래 유리의 예정 숙박 장소와 우리가 머무르려고 했던 알베르게는 달랐다.
그.
런.
데.
우린 같은 알베르게에서 또 만났다.
유리와 우리 일행은 정말 너무나 서로가 좋아졌다.
그동안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친근감이 느껴진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오랜만에 유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샹그리아도 나누고,
맛난 산티아고 케이크도 나누며,
정말 절친한 친구들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
그렇게 서로를 편안해하며, 서로 장난치고 웃었다.
처음 유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첫날, 생장에서였다.
나름 긴장한 상태였기에 혹시 생장에 한국 사람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그때 유리는 알베르게앞 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가가서 한국인이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다음 날 아침을 먹으며 유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매우 익숙한 솜씨로 아침을 준비해 먹고 있었다.
빵에 뭘 발라먹어야 할지, 버터는 어디있는지, 잼은 어디있는지,
커피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우유를 어떻게 데워야 할지…….
첫 숙소에서의 아침식사부터 나는 도전이었는데,
유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그 모든 걸 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20여 년을 살았기에,
유리는 유럽문화에 매우 익숙해 있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부터 캐시는 유리만 보면 민의 친구라고 친근하게 대했다.
나도 왠지 유리를 보면, 같은 동양인이어서 느끼는 친밀감이 들곤 했었다.
이따금씩 만나던 유리와 헤어지고 난 후,
거의 열흘이상 우리가 못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유리 이야기를 할 때면, ‘아마 유리는 산티아고에 거의 다다랐을 거야.’ 하고 말하곤 했다.
엊그저께에도 유리 이야기를 했었다. ‘유리는 벌써 산티아고에 도착했겠지?’ 했다.
그런 유리를 오늘 새벽에 정면으로 마주치고,
또 저녁에는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다니…….
새삼 우리들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피니스테라까지 걷는다고 했다.
돌아가는 날짜를 정해놓지 않은 유리.
그녀는 스스로 혼자서 깊이 있게 까미노를 걷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유리는,
여러갈래 길 중 가능하면 아름다운 우회로를 선택해 걸으려 하고,
스스로 뭔가를 용감하게 해내려고 했던, 닮고 싶은 여성이었다.
나보다 2-3살 어린 그녀였지만.
그런 유리를 보면서 나도 피니스테라까지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정보센터에서 피니스테라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고,
단 몇 구간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걷고 싶다.
나의 페이스에 따라 나만의 구상을 가지고,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진정한 까미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길이 끝나면 늘 또 다른 길이 나온다 했다.
나에게는 피니스테라라는
길이,
나왔다.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2015년 9월 21일 세인트 이레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