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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샘 Mar 08. 2023

행복한 저녁만찬

#31일 차, 내가 한 일의 전부는...

걷고,
만나는 친구들에게 친절하려 했고,
걸으면서 만났던 풍경에 감동했을 뿐이다.
어쩌면 난 그렇게 현재에 충실한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동 : Gonzar --> Melide




하루 일정을 마치고 잠시 시간이 날 때나 혹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들은 늘 다음날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저녁에도 오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어제 너무 무리한 터라 오늘은 그렇게 무리하지 말자. 25km 정도만 걷자, 했었다.


그런데, 새 아침이 밝고 새벽하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며 걷기 시작하면 늘 에너지가 재충전되는 모양이다.

오늘 우리들은 무려 31km를 걸었다!!




어제 우연히 본 일본인 커플을 아침부터 만났다. 그들은 사리아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리아에서부터 걸어도 완주증명서를 준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 캐시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까미노가 아니라고 했지만 난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일을 하는 사람이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온 가족이 걷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고, 

건강이 안 좋아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캐시는 자신의 생각을 늘 거침없이 표현한다.


오늘도 캐시는 카페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것을 가지고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회사도 같은 일을 겪는 걸 방지하기 위해 ‘화장지를 여분으로 하나 더 놓자’라는 의견을 냈었는데, 무시되었다고. 나는 한국의 화장실은 이곳보다 좀 더 깨끗하고, 휴지도 잘 구비되어 있다고 자랑을 해댔다. 

잔은 옆에서 그저 웃고만 있었다. 남자화장실은 그런 적이 없다며.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들던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 사람이었다~^^ 

급히 분위기 반전시키느라 잔과 나는 스페인 까미노가 너무 좋다느니, 와인이 맛있다느니 애를 썼다. 그런데, 그녀는 웃으면서 정말 맞는 말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내 캐시와 함께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면서 앞서 걸었다. 

그리고는 스페인에 와서 꼭 먹어야 할 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문어요리였다.





세리에를 다시 만났다.

어제저녁을 함께 먹은 이후, 함께 걸었던 일행이 있다며,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헤어졌다.

어제 대화를 나누며, 세리에가 과감하면서도 따뜻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혼자 왔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남편과는 이혼했으며, 아이가 셋이고 지금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왔단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남자친구가 같이 가고 싶다는 걸 싫다고 했단다.

본인은 혼자 걷고 싶었다며. 겉으로 보면 말없이 조용해 보이는데, 주변에 친구들이 있으면 먼저 말 걸고 쾌활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함께 걸을 땐 옆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늘 우연의 연속이지만, 어제 세리에와 만나 잠깐 그녀에게 빠졌던 터라 혹시 다시 만나면 이메일을 알려달라고 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다니…….^^ 


오후에는 많이 더웠다. 또 음악을 들었다. 너무 더워 힘이 필요했다.


이렇게 지루할 땐 음악을 듣고, 친구와 함께 할 땐 이야기를 나누고, 또 혼자 걸어도 힘들지 않을 땐 힘차게 걷는다. 어떻게든 걸어야 하는 길을 그저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걷다 보니, 이제 50km 정도가 남았다.




800km를 걷는다는 것이 가당치 않아 보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이뤄지겠지만 그게 언제일까 그저 아득한 것 같았고, 아이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이는구나……. 했었다.

이제 그 길의 끝이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을 온전히 캐시와 잔과 함께 한 것이다.

오늘은 세리에와 걸었고, 또 커터도 만났지만, 

내일은 또 누구와 만날 지 알 수 없지만,

캐시와 잔은 늘 함께 할 것이란 믿음에는 한 치의 의심도 있을 수가 없다.


우리 삶도 그렇다.

가족이 되면 늘 함께 할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가족이 된 것 같다.

까미노의 가족.




오늘 오후 정말 힘들게 알베르게를 잡고,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전자레인지로는 가능하다 길래,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내가 상상한 부엌이 아니었다.

그저, 간단한 패스트푸드를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릇도 거의 없었다.

물론 포크도 컵도 없고.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아무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잔은 눈치껏 밖에 나가 아래층 카페에 가서 포크와 몇 개의 찻잔을 빌려왔고, 바게트를 하나 사 왔다.

세리에는 어쩌다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며 와인을 쏘겠다고 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생각보다 무리해서 걸었고, 게다가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알베르게를 잡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또, 시에스타 시간과 겹쳐 근처 슈퍼도 대부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바게트와 와인을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 다들 힘든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 우리의 저녁을 위해 애를 썼다.

나는 그동안 계속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오로지 전자레인지밖에 없고 그릇도 거의 구비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라면과 수프와 햇반을 데우기가 만만치 않았다. 가스레인지에 데워야 제 맛인 수프를 전자레인지에다 데우다 보니 걸쭉하게 되지도 않았고, 시간은 시간대로 엄청 소요되었다.

겨우 그럭저럭 수프를 만들고, 신라면을 끓이기 위해 레인지 속에 수프그릇 같은 접시에 물을 넣고, 데웠다. 그런 다음 다시 수프와 라면을 넣고 또 레인지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햇반을 돌렸다. 

우리나라의 국그릇같이 속 깊은 그릇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신라면을 마치 국물파스타처럼 국물을 자작하게 해서 제공하기로 했다.

이거 원, 50대 한국주부가 라면하나 끓이는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당황스러운 환경이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나의 가족들에게 맛난 저녁을 차려주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드디어 수프, 바게트, 햇반, 신라면 파스타와 레드와인이 준비되었다.

우리들 모두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부엌이 열악해서 우리처럼 음식을 해 먹는 사람이 없어, 부엌은 온전히 우리들만의 전용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컵에 와인을 따르고,

라면답게 라면을 먹지 못했지만, 정말 흥겹고 신나게 우리의 저녁식사를 즐겼다.

물론 잔은 옆에다 물통을 놓고 연신 물을 마셨고,

세리에는 아주 천천히 매운 내색을 숨겨가며 먹어주었지만…….^^

가장 맛있게 먹어준 사람은 캐시였다. 원래 스파이시 푸드를 좋아한다 했던 캐시는 밥도 좋아했고, 신라면이 아주 맛있다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잔은 매웠지만 정말 맛있었다고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고,

세리에는 이렇게 훌륭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 했다.

캐시는 민이 정말 친절한 사람이라고 그동안 늘 그래왔다고 세리에에게 말해주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치 함께 있는 가족을 누군가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캐시.

고마워요~^^




이제 이틀 뒤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까미오에서 하고 싶은 것은,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저 걷고, 걷는 그 순간을 즐기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고민할 일을 고민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구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걷는 것,

그저 걷는 일에 충실한 것, 

그저 그 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 것.

이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걷고,

만나는 친구들에게 친절하려 했고,

걸으면서 만났던 풍경에 감동했을 뿐이다.

어쩌면 난 그렇게 현재에 충실하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삶을, 

주어지는 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9월 15일, 멜리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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