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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5종 함께 하실래요?

20250413_풍중 러닝

by 나태리

21킬로미터 2시간 40분 정도


복사꽃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큰 딸과 남편의 매서운 눈초리가 등에 꽂힌다. 버스를 타고 가려했으나 한 대를 그냥 보냈다. 다음 버스는 다른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 다시 들어왔더니 분위기가 조금 나아진 듯했다. 빨래와 방청소를 마쳤더니 경기 시각이 다가왔다. 배번호표를 붙이고 나와 호수를 뛰기로 했다. 경기장은 아니지만 나만의 경기장에서 뛸 수는 있고, 내가 원하는 맞춤형 코스를 구성할 수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했지만 그냥 달리기로 했다. 미루면 오늘은 뛰지 않을 것 같았다.


비가 조금씩 오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그런데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애플워치에서 고음경보를 발동했다. 뛰는 동안 두 번이나 그랬다. 비가 어느새 그치고 세상이 밝아졌다. 신선한 봄 아침 그대로였다.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 사이로 보도 블록에 섞인 모래가 햇빛에 반사하여 빛을 냈다. 잠시 후 비가 내리고 이번에는 우박까지 내렸다. 피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우박을 맞으며 달렸다.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산별동까지 달려가 보았다. 새로 조성된 동네를 가보니 10년 전 이곳에 내려왔을 때 분위기가 떠올랐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맞이하는 것 같다. 꼭 인생처럼 따뜻할 때 힘든 순간 등 번갈아 가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순간순간 무시하고 그냥 뛰다 보니 어느새 15킬로미터를 채웠다. 집 근처라 여기서 마무리할까 하다가 이렇게 오래 뛰기는 쉽지 않아 내친김에 하프까지 뛰어보기로 했다. 오히려 15킬로미터 이후 숨쉬기에 단련되어 뛰기가 수월했다. 다만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우중 러닝, 설중 러닝은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풍중 러닝은 처음이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오르막, 내리막 길을 모두 달리면서 강훈련을 해보았다. 내 페이스대로 뛰니 험한 환경 속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21킬로에 들어섰을 때 시계 배터리가 나갔다. 갑자기 뛸 의욕이 사라졌다. 하지만 집까지 끝까지 뛰었다. 최종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마라톤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나름 코스를 정해서 20킬로미터 이상 달리면 인생의 사계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치고 힘들면 20킬로미터를 달린다. 그리고 나면 해외여행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고 현재를 만족해한다. 가성비 좋은 운동이다. 해외여행 비용, 음주 비용, 쇼핑 비용보다 저렴하다. 아니 하나도 돈이 들지 않는다. 참고로 뉴발란스 바람막이 잠바를 입었는데 훌륭했다. 비도 막아주어서 배번호가 젖지 않았다. 선글라스랑 모자가 없어더라면 변덕스러운 경로를 완주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좋은 물건은 상황이 험할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마치 좋은 사람도 내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처럼 말이다. 험한 길을 도와주는 장비들, 인생에서는 그 장비가 사람일 수도, 돈 일수도, 지식일 수도 있을 것 싶다. 이 셋을 아우르는 지혜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서 달리기는 명상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달리기를 할 때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주변을 관찰하고 느끼다 보면 주변의 문제들이 해결된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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