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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석 Jan 06. 2024

자본주의의 꽃

05.

 손목 부상으로 그만두었던 테니스를 다시 시작했다. 초보 단계에서 그만두었고, 1년 넘게 배우지 않았으니 사실상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운동을 멈춘 사이 골프붐이 테니스붐으로 옮겨 왔나 보다. 너 나 할 것 없이 주변에서 테니스를 쳐댄다. 가뭄에 콩 같았던 테니스장도 여기저기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레슨 등록이 만만치 않다. 특히 직장인이 몰리는 퇴근 후 시간에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아 눈 딱 감고 그냥 아침시간에 등록했다.  


 떨리는 첫 레슨 시간,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끈덕지게 해 보겠다며 테니스화도 하나 샀다. 눈처럼 새하얀 테니스화를 신고 오랜만에 라켓을 거머 줘니 벌써 뭐라도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아침 운동은 갓생 사는 임원들의 라이프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월급쟁이인 내가 새해 벽두부터 아침운동이라니. 올해 뭔가 색다른 포문을 여는 것 같아 겨울 찬바람에도 기분이 설렜다.

 

 처음 뵌 코치님이 기본자세부터 친절히 알려주셨다. 마음과 벌써 샤라포바인데 몸은 영 따라주지 않았다. 예전에  좀 배웠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의 몸은 덜컹덜컹 삐걱삐걱거렸다. 그 와중에 침착하지 못하고 성격은 급해서 허공에 부지런히 삽질하다가 허망하게 첫 레슨이 끝났다.


 새로운 코치님은 참 친절하셨다. 나라면 어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는 나를 보고 한바탕 크게 웃었을 것 같은데 속으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으셨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매우 젠틀하셨다. 참을성이 대단하군. 하하하. 역시 비싼레슨이라 그런가.


 



 문득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자본주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친절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돈을 쓰면 다양한 것들을 살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오히려 돈을 쓰면 '타인의 친절함'을 살 수 있다는 점이 더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꼭 돈을 써야만 친절함을 살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상에는 기꺼이 타인에게 자신의 친절함을 무상으로 베푸는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하루가 다르게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유니콘처럼 점점 희박해져 간다. 오히려 섣불리 타인에게 친절했다가는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러워지는 세상이다.


 나만해도 지하철역에서 누가 말을 걸면 대뜸 도망부터 친다. 예전에는 길을 몰라 물어보려고 '저기요, ' 한 마디만 해도 뒤돌아 보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다들 투명인간 취급한다. 유튜브 쇼츠에 종종 뜨는 실험 카메라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친절한 시민들 영상을 보면 감격스러워 눈물이 줄줄 난다. 그만큼 무료친절은 점점 희귀해져 간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지출과 함께 돌아오는 친절함은 보통 해당 지출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 같다. 돈을 많이 쓰면 사람들이 더 친절해진다. 돈을 많이 쓴 것 같은데도 상대가 내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건 그 사람들 기준에서는 내가 돈을 좀 모자라게 쓴 것이 아닐까?


 명품 매장에 가면 가끔 느낀다. 나는 분명 하나에 몇 백만 원 하는 물건을 사러 왔는데 내게 물건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그마저도 한 번 제대로 살펴볼라치면 장갑 낀 손으로 본인들이 보여줄 테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직원들. 나한테는 큰돈이지만 그들에게는 부족해서 그리 덜 친절했나보다.




 아무튼, 나의 절친 H는 20대 때 백화점 1층에서 파는 명품화장품 브랜드 하나에 자신의 소득 대부분을 썼다고 했다. 과외 선생님, 계약직 인턴, 정규직 신입사원이 되었어도 기초 화장품 하나에 십만 원이 훌쩍 넘고, 립스틱 하나에도 삼사만원이 훌쩍 넘던 그 브랜드를 마음껏 소비할 수준의 벌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남들 눈치 보면서 어렵게 번 돈을 분명 절약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매장에 들어서면 번번이 무장해제되어 지갑이 활짝 열렸다고 한다.


 "왜 그랬어? 진짜 그 화장품이 그렇게 좋아서 그랬어?" 물었던 나.


 정말 비싼 만큼 제품 퀄리티가 좋아서 아름다운 피부 유지를 위해 끊을 수 없었던 것일까? 싶어 질문하던 내게,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긴 늘 친절하고 따뜻했어. 알잖아. 회사에서 거지 같은 인간들한테 치이고, 진상 고객들한테도 치이고 심지어 협력업체 사장님들한테도 하루종일 치이다 거길 가면 매장 언니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더라고. 비싸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잘 찾아보면 가성비 좋은 화장품들 많다는 것도 아는데. 그냥 뭐랄까, 워낙 어릴 때부터 다녀서 그런지 한 번씩 가면 어찌나 나를 반겨주던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그냥 마음이 힘들면 그런 환대와 친절함이 그리워서 습관적으로 거길 갔던 것 같아......"


 뿌에에엥.


 어떤 마음이었을지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 H는 더 이상 그곳에서 큰돈을 쓰지 않는다. 힘든 마음을 달래줬던 타인의 일시적인 친절함 패치는 결국 응급조치 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요즘은 자기 계발에 심취하여 각종 클래스와 배움에 몰두하며 자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


 나라고 그런 적이 없었을까.

 

 최근 항공 마일리지로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서 난생처음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봤다. 자리에 앉기 전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벗고 있는데 그사이 승무원이 잽싸게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자 그만 흠칫 놀라 눈이 토끼눈처럼 커졌다. 왜 손을 내밀지? 싶었는데 비즈니스석은 승객들의 외투를 따로 가져가 별도 공간에 보관해 주더라.


 몰랐다. 이코노미에서는 보통 외투도 좌석 위에 보관함에 올려두는데 그마저도 잽싸게 넣어야 한다. 늦게 탑승하면 이미 자리 위 짐공간이 꽉 차 있는 경우도 빈번해 옷 놓을 곳이 마땅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습관처럼 잽싸게 코트를 둘둘 말아올려 짐칸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옷을 달라고 하니까 놀란 토끼눈이 된 내가 좀 부끄러웠다. 외투 보관을 시작으로 본인이 내 담당 승무원이라며 코 앞에서 자기 소개하시고는 이후 비행 중 정말 수시로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비행시간 내내 그녀의 내게 참 친절했다.  


 캬.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역시 자본주의의 꽃은 친절함이야!


 2024. 01.06 한 줄 평

 

 뜬금없지만 그동안 돈 조금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신 분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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