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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석 May 11. 2024

낯선 문자 한 통

01. 완벽한 사육을 거부한다.

 시작은 문자 한 통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날이었다. 지극히 평범해 권태롭기까지 했던 날, 여느 때처럼 반자동적으로 회사 메일을 새로고침을 하고 있는데 '드르륵' 울리던 핸드폰 진동음.


 5년 전, 한창 이직준비를 하던 무렵 긴밀히 연락하던 해드헌팅사에서 온 문자였다. 해당 회사를 통해 관심 있던 기업들의 면접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끝내 성사된 곳은 없었다. 지금 회사는 공식 홈페이지에 기재된 경력 구인공고를 보고 직접 지원해 입사했다. 8년이 넘게 다닌 첫 회사를 떠나 내 생에 첫 이직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COVID-19,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감히 가늠도 못한 채, 위험하니 일단 집으로 귀가하라는 지침을 따라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으로 어정쩡하게 노트북을 챙겨 돌아오던 날이 기억난다. 다행히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나 역시 한 차례 지독하게 앓았으나 살아남았다. 쏜살같이 2년이 흘렀고, 코로나가 종식되었어도 튼실한 중견기업이었던 회사의 실적은 좀처럼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장을 멈춘 회사는 서서히 칠흑 같은 암흑으로 침몰하는 타이타닉 같았다. 창사이래 처음 희망퇴직을 받았고, 적자가 심한 사업들을 과감히 손보기 시작했다. 과거 눈부신 영광을 얻게 해 준 사업들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큰 불협화음이 일었으며, 의리의리한 회사 외관과 달리 실내 공기는 어딘지 늘 무거웠다. 청춘을 바쳐 영광의 시간을 일구었던 선배들이 씁쓸한 뒷모습과 함께 소리소문 없이 회사를 떠나자 허리급 인재들의 동요와 이탈이 심해졌다.


 공공연히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뼈 있는 말들이 번졌고 익명 게시판에는 회사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 대신 악의적인 조롱, 구성원들 간의 서로 깎아내리기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적극적으로 이직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회사생활을 10년 넘게 한 짬바랄까, 내공이랄까. 원래 회사란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싶었다. 따박따박 월급 잘 들어오는데 뭘 더 바랄까.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데, 최소한 내 대에서 이 회사가 망할 것 같진 않았다. 집이 가까워 통근이 편하고, 어디 내놓아도 꿀릴 것 같지 않은 사내 부대시설과 심지어 구내식당에서 삼시세끼 공짜밥도 준다. 낼모레면 마흔인데 이 나이에 어딜 또 갈까. 다만 내가 입사 후 얼마되지 않아 인사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승진과 진급, 경쟁이 사라졌다. 마치 공무원 호봉제처럼 바뀐 밴드 임금제에서 몇 년째 월급이 제자리걸음인 것이 가끔 거슬렸다. 그동안 살인적으로 오른 금리와 물가를 생각하면 급여는 오히려 역행차원이라, 13년 차가 되어도 신입사원일 때보다 삶의 질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아 사는 게 팍팍했다.  


 야심 있고 성취욕 있는 직원들이 떠난 자리는 권태로움과 익숙함이 편안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누구도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고, 뜨뜻미지근한 회의들이 반복됐다. 연봉이 제자리걸음인데 물가가 너무 올라 구내식당에서만 밥을 먹었고 사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퇴근했다. 새로운 일들을 벌리지 않으니 야근 따윈 없었으며, 가끔씩 귀갓길에 '완벽한 노예 사육이란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호강에 겨운 양반계집 같은 투정이라고 자조하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던 중 도착한 문자 한 통.


 최근 몇 년 동안 엄청나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회사. 입이 떡 벌어지는 인센티브로 직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는 바로 그 회사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폰부스로 향한 후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픈된 포지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헤드헌터에게 들으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들이 찾는 조건과 내 지난 이력이 90%, 아니 거의 99% 일치했다. 마치 나를 콕 집어서 오픈한 공고 같았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곳은 내가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다녔던 첫 기업의 다른 계열사라는 점. 내가 나올 때만 하더라도 한 번 그곳을 저버린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 따윈 주지 않았다. 조심스레 나의 우려사항을 말하니 헤드헌터 왈, 최근 몇 년 동안 그룹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오히려 이제는 그곳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내가 더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력 이직의 좋은 점은 나의 잠재 가능성을 굳이 장황한 자기소개로 어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돌아와 그간의 이곳에서의 업무들을 빠르게 정리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헤드헌터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 어디 밑져야 본전이지.' 싶은 생각이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패기 넘치는 신입공채로 시작해 10년 가까이 다녔던 기업이다. 그곳의 문화는 헤드헌터보다 어쩌면 내가 더 잘 안다.

 

 변했다고 하는데, 정말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줄까? 싶어 반신반의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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