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위가 뭔가요?

09. 비상대책위원회 등장

by 이예석

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비대위'로부터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다. 기존 조합의 무능력과 조합장의 비리에 대한 폭로가 곱게 접힌 A4에 한가득 적혀 있었다. 처음 비대위의 우편물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히 소수 조합원들의 항의서쯤으로 여겼지 앞으로의 벌어질 헬 게이트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평소 어떤 조직이든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비대위의 우편물도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사그라 들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비대위 우편물의 도착 빈도는 점차 늘었고, 단체 카톡방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묘하게 편 가르기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곧바로 기존 조합에서 대응 우편물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합의 분열'구 세력 vs 신 세력' 간의 전쟁을 의미했다.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에 앞서 등장 캐릭터 소개부터 해본다. 우선 기존 조합의 수장인 조합장 할아버지(일명 ‘조합장 할배’). 나이는 60대로 추정되며 원주민 출신이다. 귀신아파트 재건축 조합이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이 사업을 이끈 인물로,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합장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런 조합장 할배에게 반기를 든, 비대위의 핵심인물로는 50대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있다. 원주민은 아니며, 나처럼 재건축이 어느 정도 진행 된 후에 들어온 후발투자다. 한마디로 고인 물과 뉴페이스 간의 세력 다툼이다.


비대위원장 아주머니가 조합장 할배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가 기존 건설사와 한패로 사업비를 남발하며 조합 사업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그간 조합 운영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면서 분별없이 사업비를 사용했고, 내버려 두었다가는 사업 파탄, 즉 부도가 날 수도 있다고 했다. 능력도 안 되면서 자리 지키기만 급급한 인물이라는 인신공격은 덤이다.


이에 맞서는 조합장 할배는 비대위 아주머니가 일반 조합원이 아닌, '투기세력'이라며 응수했다. 근방의 다른 재건축 사업에서도 기존 조합을 분열시키고, 본인 마음대로 사업을 진척시켜 이문을 남기는, 말 그대로 전문 '꾼'이라 응수했다. 또한 다른 재건축 사업에서 하청업자들로부터 뇌물을 수술한 혐의로 고발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라 폭로전을 펼쳤다. 누구 말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26일 오후 08_31_56.png

때마침 비대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카톡방이 추가 개설되었다. 당연히 나는 또 누군가에 의해 카톡방에 자동소환 되었다. 새로운 카톡방에서는 '정직하고 바른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 조합을 해산하고, 새롭게 조합을 꾸려야 한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분위기는 점차 과열됐다. 조합은 구관이 명관이라며, 기존 조합을 지지하는 이른바 보수층과 싹 다 뒤집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며 비대위에 힘을 싣는 진보층으로 분열됐다. 물론 상황을 관망하며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는 나 같은 중도층도 있었다. 각 진영에서 서로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고소장, 해명 글, 해명 글에 반론 글, 그 반론글에 또 해명하는 글들이 난무했다. 이미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낯선 이들과의 카톡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나는, 결국 두 개의 카톡방을 모두 나왔다. 하루하루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단체 카톡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몇몇 조합원들이, 카톡 방을 나간 나 같은 이탈인들에게 개별적으로 1:! 문자 메시지와 카톡을 수시로 보내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며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나로서는 지옥이 바로 여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나잇대라며, 친하게 교류하자는 생면부지 조합원의 개인 카톡이 온 순간 ‘이거 고소해야 하는가?’ 싶어 현타가 제대로 왔다.


새 아파트고 뭐가 당장 처분하여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사업이 중단된 것이 외부에 알려져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때마침 정기총회 안내 우편물이 도착했다.


더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놈의 총회'에 직접 출타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서 내 눈으로 직접 상황을 살펴보고, 현장 분위기와 다른 조합원들, 조합 임원들을 면밀히 살핀 뒤 헐값에라도 팔아버리던지, 좀 더 존버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서류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때론 현실에서 선명히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행간을 못 읽으니 하다못해 인생의 빅 데이터라는 ‘쎄한 촉’이라도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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