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사업 중단
고난의 전조는 어느 날 갑자기, 소리도 없이 쓱 다가왔다. 갑자기 '사업을 잠정 중단한다'는 내용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곧바로 조합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시공사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건설 원자재 값이 급등하여 기존 계약대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고 했다. 기존에 산정된 추가 분담금을 물리고, 상승한 건설 자재 값을 반영한 새로운 추가 분담금을 설정해야 사업을 다시 정상 진행하겠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 벼락 칠 소리인가.
귀신 아파트를 시공하기로 한 건설사는 특 A급 대형 건설사는 아니었지만 신용등급이 좋은 편의 중견 건설사였다. 내가 귀신 아파트 매수를 결정했을 때, 이미 선정되어 있던 해당 건설사에 대한 신뢰도 한몫을 했는데 이렇게 뒷 통수를 치다니!
조합에서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이니 최선을 다해 시공사와 다시 소통 중이니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만 귀신아파트 재건축 사업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지 글로벌 정세까지 영향을 끼칠 줄은 몰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다. 조합 관계자의 설명대로 일단 기다려 보았으나, 곧 새롭게 산정된 추가 분담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일명 ‘추가 분담금 폭탄 사태’가 내게도 벌어진 것이다. 신구 추가 분담금은 기존 추가 분담금에서 약 2억 가량 증액되었다.
2억이라니......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는 '요즘 같은 세상에 2억 정도야'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갑자기 2억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어디서 더 융통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인 원주민 어르신들은 막막함을 넘어 조합에 엄청난 분노를 쏟아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맹목적인 분노를 표출하는데 반해 때는 전쟁 여파로 각종 원자재 값이 폭등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당황스럽긴 했지만 시공사의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견 건설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던 시기였다. 이름을 들어도 알만한 중견 건설사들의 줄도산으로 연일 미디어가 시끄러웠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그날부터 편두통이 심해졌다.
전쟁 종결은 언제가 될지 가늠할 수 없고, 내수 경제 지표들도 바닥으로 치닫던 때라 애초에 투자 목적으로 매수한 눈치 빠른 조합원들이 난리 통에 귀신 아파트를 급매로 던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지금이라도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던져야 하는 걸까? 탈출은 지능 순인가?’ 싶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었다. 만약 부동산이 아닌 주식 투자였다면 나는 좀 더 과감히 손절할 수 있었을까? 주식에 비해 부동산은 손절 결정을 해도 실행이 어렵다. 또한 손절한 금액으로 또 다른 보금자리를 구해야 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대단한 투자 수익을 바란 것도 아니고 내 몸 하나 편히 누울 곳이 필요해 재건축 투자를 감행했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까맣게 태웠다.
갑자기 난리 통에 조합원 단체 카톡방이 개설되었고, 나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 소환 되었다. 매일매일 다양한 사람들의 맹렬한 분노와 하소연, 또 앞으로의 막막함에 대해 성토하는 메시지가 쉼 없이 올라왔다. 낯선 이와 온라인에서 대화하는 것, 특히 익명의 다수와 소통하는 것에 질색하는 나는 PTSD가 올 지경이었다. 알림 기능을 까놔도 수백 개의 카톡 메시지 알림이 앱 귀퉁이에 쌓이는 꼴을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정작 제대로 된 정보는 없이 감정 쓰레기통 같은 부정적인 기운들의 카톡만 보고 있으니 제대로 망한 것 같아 점점 더 우울해졌다.
만약 나처럼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소통하는 것이 힘든,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면 재건축을 통한 투자나 내 집 마련은 신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재건축 사업 성공이라는 목적 하나만 같을 뿐, 연령과 성별, 직업과 교육 수준,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수의 사람들과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 일은 온라인상에서도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귀신 아파트는 특히 연식이 오래되어 조합원들의 평균 연령대가 높았고, 30대인 나는 매우 젊은 축에 속했다. 카톡방에는 재건축 사업과 상관없는 정치 성향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인물들도 있었고, 뜬금없이 맑은 하늘과 꽃 사진, 심지어 시를 올리시는 분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요지경 난장판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조합에서 사업 실행하는 대로 잘 따르면 어련히 되겠지' 하는 다분히 수동적 태도를 가졌었다. 하지만 더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 없는 시점인 것 같았다. 내 두 눈으로, 내 두 손으로 귀신아파트 재건축 사업의 실체를 똑바로 속속들이 파악하지 않으면 속된 말로 'X 될 수 있겠다'는 촉이 본능적으로 발동했다.
그동안 총회에 한 번 도 직접 참석해 보지 않았다. 그동안 대부분 서면 결의서를 우편으로 제출해 처리했다. 하여 다른 조합원들과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심지어 조합장과 조합 핵심인물들의 얼굴조차 몰랐다. 조합의 주요 자료와 사업 진척 상황은 조합원 전용 온라인 카페에 정리되고 있었다. 평소에 본척만척했던 카페에 들어가 게시물들을 하나하나 똑바로 살펴보았지만, 끓어오르는 투쟁 의지에 비해 여전히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까막눈 상태로 좌절감만 심해졌다. 이 시점 이후로 흰머리가 2배로 늘며 광속 노화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