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딸로 태어난 포도는 나를 꼭 닮았다. 사실 그럴만한 일이 아닌데 너가 어떤 생각으로 마음이 불편한지알겠고, 뾰족하게 구는 이유가 사실은 불안하고 자신이 없어서 라는 것도 안다. 아이의 체력이지만,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항상 마음만큼 몸이 안따라주는 것도 알것같다. 새로운 일에 에너지를 왕창 몰아쓰다 보니 전력을 다 했던 일이 끝나면 방전돼서 멍..해지는 것도 나랑 닯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이 찾아왔을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토닥여주면 누구보다 순한 아이가 되어서 잠이 드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너가 정말로 화가 났거나, 정말로 혼자 있고 싶어서 뾰족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아니까.
그런에 너의 아빠는 타고 나길 자신감이 넘치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야. 재주가 많아서 하고 싶은 뭔가를 시도하면 대부분 중간 이상의 결과가 나왔기에, 어쩌면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의 기분’을 잘 모를지도 몰라. 아니면.. 어쩌면 안되는 일에는 금방 흥미를 잃어서 쉽게 포기했을지도 몰라. 아빠도 모든 일을 잘하진 않았을테니까. 그런 일들은 아빠에게 “안돼서 포기“라기 보다는 ”재미없어서 안해”라고 기억됐을까? 그러니까 우리처럼 끈기있게 계속 도전하고, 그랬다가 좌절하는 경험은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해. 그래도 끝까지 해내고 싶다는 마음, 하고 싶지만 안돼서 속상한 마음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기도 해.
엄마는 그 마음을 잘 알지. 엄마는 처음부터 잘했던 기억은 많지 않아. 조금만 긴장을 풀고 대충하면, 놀면서 한 아이들보다도 못한 결과가 나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도 마냥 놀면서 한 건 아니었을텐데 어쨋든 어린 엄마는 그렇게 느꼈어. 나는 능력이 있는 아이인데, 그 능력이란 건 노력하는 능력이구나. 그래도 노력하면 엄마가 목표했던 수준까지 가기도 했거던. 봄에 새학기를 시작할 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주눅이 들었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학기가 끝날때쯤 되면 엄마가 어느새 그 뛰어난 친구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어. 해가 바뀌고 다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또 쫓아가는 입장이 되었지만 말이야.
엄마의 언니, 이모 알지? 이모는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정말 잘했어. 학교에서 제일 잘했을걸? 그래서 엄마는 항상 이모가 부러웠어. 할머니 할아버지나 선생님들의 칭찬을 듬뿍 받았으니까. 엄마가 아나운서를 했던 건 알지? 아나운서 시험을 보러 다닐때도 항상 다른 친구들이 엄마보다 잘했어. 엄마는 열심히 준비해놓고서는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면 떨려서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았거던. 그런데 그렇게 항상 집에서는 언니를, 집 밖에서는 잘하는 친구들을, 따라가려고 애쓰다 보니까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이만큼 자랐더라. 포도가 보기에도 지금 엄마가 뭐든 잘 알고 또 잘하는 것 같지 않아? 물론 그림이나 스케이트 실력은 포도가 엄마보다 낫지만.
처음부터 한번에 쉽게 되는 일이 없어서, 엄마는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더 많은 걸 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한번에 아나운서가 되고 계속 그 일을 편안하게 했다면.. 지금처럼 변호사가 될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을테니까. 결국 하고 싶던 아나운서라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하나의 직업으로 끝난다는 건 아쉬워서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도전했던거야. 엄마는 노력하는 건 잘하니까 노력하면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어도 결국은 변호사가 될 거라고 믿었거던.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지!
어렵지만 해내려고 애쓰는 마음은 귀한 거야. 그렇게 애쓰다보면 어려운 일에도 도전할 용기를 주거던. 엄마가 어린 시절 부러워했던 이모나, 엄마의 친구들이 이제 엄마에게 물어봐.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낸거야? 하고. 엄마가 안돼서 좌절하고, 힘들었던 시간을 극복해낸 경험이 없었다면, 엄마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했을거야. 포도에겐 이미 ‘노력하는 재능’이 있어. 그 재능으로 나중에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줄거야. 물론 엄마도 깜짝 놀라겠지.
너가 어젯밤 울면서, 내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결국 양치를 하고 자겠다고 말했을때 너무 고마웠단다. 그리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양치질만 하고 책은 읽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라고 말하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지. 포도는 깨끗하고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랄 것 같아. 엄마가 너의 응원에 힘입어 책을 쓰게 되면, 엄마의 책도 꼭 읽어줄거지?
어젯밤 결국 우리가 짧은 아치책을 읽고 눈을 감았을 때, 아빠는 드르렁 푸 하면 잠들었던데 알고 있어? 파니가 아빠가 자는 소리라면서 입으로 푸- 하는 흉내를 냈어. 포도는 바로 잠이 들어서 못들었을까? 포도가 속상해하는 일에 같이 속상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줘야할지 모르고, 피곤함에 스르륵 잠든 아빠가, 엄마는 어제 참 야속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듬어줘야할 귀여운 아저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아빠는 우리처럼 노력하는 재능은 없지만, 그 재능을 못 얻은 대신에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불안힐때 아빠의 재능을 빌어 편안한 마음을 나눠받을수 있겠다.
엄마는 포도를 많이 이해하지만, 가끔은 엄마도 여전히 체력이 약하고 자신감 없는 마음이 있어서 포도를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하는 날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건 엄마의 진심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 받아주기 재능’이 부족해서라고 이해해주면 좋겠어. 잠만 푹 자고 일어나면, 다시 포도를 한껏 품어주는 엄마로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