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서머셋 몸이 쓴 이 중편소설은 그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 같은 작품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20대때에 내가 읽었던 이 책에는 아마도 내가 읽었던 소설중에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로지(Rosie)라는 이름의.
이 소설의 화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중견소설가이다. 편의상 그를 A로 불러본다. 모든 이야기는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당대에 가장 유명하던 원로 소설가가 죽으면서 그의 미망인은 A에게 그 소설가의 전기를 쓰기 위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미망인은 그의 두번째 부인이고, 첫번째 부인은 바로 문제의 로지였기 때문이다. A는 청소년기에 원로소설가(물론 그때는 젊은이였지만)와 로지의 친구로 지냈기 때문에 들려줄 후일담이 많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소설은 소설가라는 직업의 뒤면의 얘기, 영국 문학계의 속물근성 등등 사소한 잡담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사실 전적으로 로지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로지에 대한 부분은 전체 소설의 2분의 1 정도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 소설을 읽고나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은 로지 밖에 없으니, 이처럼 적은 내용으로 기억에 각인되는 존재를 창조해내는 몸의 능력은 대단하다.
소설은 이렇게 전개된다. 원로 소설가 – B라고 부르기로 하자 – 는 젊은 시절에는 자유분방한 문학청년이었고, 로지는 그의 아름답고 쾌활한 아내였다. 사춘기 소년인 A는 그의 동네에 온 소설가 부부와 자연스럽게 어울려 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A는 런던에서 직장을 가진 사회인이 되고, 그곳에서 다시 B와 로지 부부를 만나게 된다. 로지 부부는 자주 파티를 열고, A는 전처럼 그곳에서 로지와 자주 시간을 보낸다.
로지에 대한 묘사는 사실 소설 어느 곳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다. 그저 육감적인 얼굴에 풍만한 육체를 가진 여자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특별히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A는 도시에 나와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다가, 이전부터 다정하게 대해준 로지와 어쩌다보니 하룻밤을 보내게된다. 고독함을 느끼며 갑자기 눈물을 쏟는 A를 로지가 안아주고, 바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몸은 두 사람이 관계를 갖기 직전의 장면에서 갑자기 소설을 1인칭 시점으로 쓰게 되면,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난처해진다는 둥 장황한 문학이론을 펼친다. 두 사람의 섹스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것이 독자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작가 특유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지나서 몸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남자와의 섹스에 익숙한 그가 너무나도 낯선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묘사해야 하는 곤혹감을 피하기 위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섹스가 끝난 후에 창문 커튼을 열고, 새벽 햇볕을 받는 로지의 몸을 주인공이 묘사하는 부분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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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에게 기대었을 때 그녀의 유방은 나의 가슴에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후 침대에서 나왔다. 나는 촛불을 켰다. 그녀는 거울을 향해서서 머리를 묶고 잠시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허리는 가늘었고, 그녀의 가슴은 대리석으로 빚은 듯 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를 위해 만들어진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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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젊은 마음에 로지가 남편도 모르게 자기만의 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흥분과 행복으로 가득찬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자기의 애인이라고 생각한 로지가 자기 집에서 여는 파티에 오는 나이많은 남자들에게도 항상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어쩌면 자기만이 로지를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에 빠진다.
결국 로지가 값비싼 코트나 장신구를 걸치기 시작하자, A는 로지에게 파티에 자주오는 부유한 상인과도 자신과 비슷하게 만나고 있냐고 묻고 급기야는 언쟁을 하려는 순간, 로지는 아마도 이 소설에서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대사를 때린다. 아마도 이 부분은 로지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묘사하는 부분이라서 좀 길게 인용을 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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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그자가 당신에게 그런 비싼 선물을 친구사이라서 주었다고 믿으라고?”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그 사람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어쩌면 다시 안 올지도 몰라.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만 선물을 받은 것도 아닌 걸.”
나는 화가 나고, 상처를 입은, 그리고 분함이 가득한 눈으로 로지를 봐라보았다. 그때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지은 그 부드럽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기야.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그래? 당신한테 무슨 피해가 간다고? 내가 즐겁게 해주지 않아? 나하고 있으면 행복하잖아, 안 그래?
“엄청 행복하지.”
“그럼 됐어. 화내고 질투하는 건 다 어리석은 짓이야.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에 행복하면 되잖아? 기회가 있을 때 맘껏 즐겨. 어차피 백년이 지나면 우리는 다 죽고 없어. 그때는 뭐가 문제가 되겠어? 우리 할 수 있을 때 좋은 시간을 갖자.”
그녀는 내 목을 팔로 감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나는 화가 났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녀의 친절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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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페이지 남짓한 이 부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로지라는 여자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로지는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다정한 여자다. 남자들은 로지에게 선물을 하고, 로지는 그들과 사랑을 나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선물을 주는 남자에게, 그 선물이 값비싼 코트이건 장신구이건 로지는 자기가 줄 수 있는 자기만의 선물을 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육체다. 마치 꽃다발을 건네 준 소년의 볼에 뽀뽀를 해주는 소녀처럼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다. 아무런 도덕적인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자인 A를 제외하고는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로지를 난잡하고 부도덕한 여자로 단정한다. 앞에서 말한 미망인과 A가 만난 자리에서 미망인이 A에게 로지의 행실을 비난하자 A는 로지를 이렇게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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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아니었죠. 그저 다정한 감정을 갖게 했어요. 그녀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끼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어요. 그녀는 숲속에 있는 맑고 깊은 물웅덩이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안에 뛰어들면 천국같은 쾌감이 느껴지는 그런 웅덩이말이에요. 그 안에 부랑자나, 집시, 아니면 별장관리인이 나보다 먼저 몸을 담그었다고 해서 그 물이 불쾌해지거나 탁해지는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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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가 100년후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는 말을 하는 부분 이후의 소설은 그저 남은 매듭을 정리하는 수준이다. 로지는 소설가 B를 떠나서 부자 상인과 미국으로 도피하고, 화자 A는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로지를 재회하여 과거를 회상하는 신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로지는 그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일까? 나는 젊은 시절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서머셋 몸은 항상 현실의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오는 작가였고, 자서전에서도 자신은 상상력이 부족해서 예리한 관찰력으로 그런 약점을 보충한다고 말하곤 했다.
남자와 시간을 보낼 때에는 순간에 충실해서 그 남자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절대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한 남자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여자. 모든 남자에게 사랑을 골고루 나눠주는 여자. 남자가 선물을 건네면 기꺼이 자신을 선물로 주는 여자. 그런 여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항상 있었고, 그런 여자에게는 공허한 도덕론은 무의미할 뿐이다.
부르조아 도덕에 사로잡힌 남자. 이를테면 소설 속의 A와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분노와 질투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저 헛된 일이다. 로지와 같은 여자는 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로지가 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은 독수리가 고기를 낚아채거나, 아름다운 장미꽃에 가시가 맺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런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