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이 문장을 읽고 있으면, 존재와 흔적에 대해 곱씹게 된다. 존재는 레이어처럼 켜켜이 쌓여있는데, 흔적이 모이면 내가 되지만 흔적 자체를 나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따라서 흔적은 아름다워도 존재는 아름답다는 하나의 층위로 설명할 수 없다.
출근길 무거운 발걸음으로 굼뜬 계단엔 나의 분주함이 남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 책상엔 어지러움이 널브러져 있다. 가뿐하게 뛰고 난 후 잠수교에는 비로소 오늘을 보내줄 수 있는 우표가 남고, 주말마다 가는 스타벅스엔 글을 쓰며 한 주를 잘 소화시킨 내가 있다.
마르지 않는 비옷처럼 가는 그 어디에서든 사람은 본인의 존재를 뚝뚝 흘리며 지나온다. 참으로 질퍽질퍽한 세상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고여있는 곳 하나를 꼽아보자면, 옷장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아니지만 옷장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옷에는 그 사람의 욕망과 삶의 태도가 묻어있다. 옷장에는 욕망이 한가득. 옷을 잘 버리지 않는 편이라 옷을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대학생 땐 옷이 좋아 밥을 굶어가며 옷을 샀다. 옷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내가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구제 옷과, 채도가 높고 문양이 많은 옷들을 입었다.
점잖은 옷을 입으며 나잇값 좀 하라는 말은 원래 흘려듣지만, 뾰족했던 취향이 점점 무뎌지는 걸 느낀다. 이전에 샀던 옷들에 손이 잘 안 간다. 내 취향이 자의로 바뀌었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데. 그게 너무나도 서글프다.
지금 옷장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운동복이다. 운동이 아니라면 필요가 없는 메시 티셔츠랑 레깅스. 올해 들어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운동이 주는 쓴 맛과 단 맛을 번갈아 먹다 보면 정신을 차릴래야 차릴 수가 없다.
'꾸준히, 오랫동안, 점점 강도를 높여서' 라는 간단한 공식만 지키면 누구나 운동을 잘 할 수 있다. 공식은 간단한데 적용이 힘들다. 러닝을 할 때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이젠 다 때려치우고 그만두고 싶은데, 앞 사람은 왜 이리 잘 달리는지.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느냐면서 호흡을 고르며 분해 할 뿐이다.
'내가 무슨 운동을, 아니야 그래도 한 번 더?'를 반복하다 보면 내공이 쌓인다. 넘지 못한 선을 넘었을 때 그 짜릿함은 뇌랑 머리를 뚫고 나온다. '이게 되네.'로 얻은 자신감을 연료로 '이게 안 되네.'의 시기를 버티고 있다. 눈 뜨면 월요일이고 또 감았다 뜨면 주말인 지난한 일주일의 반복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운동복을 입고 종종 회사에 갔는데, 누군가 나보고 스포티걸 같다고 말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적은 날 것의 말이다. 쥬니어네이버 옷 입히기에서 나올 법한 말을 내게 하다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지만 지금 나의 순간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 같다. 이 순간이 또 흔적이 되어도 옷장 한 켠에서 꺼내고 뺨 부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