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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Feb 05. 2022

사랑을 품은 연주

100일 글쓰기 - 18


어떤 연주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답을 하려 말을 고르는 찰나, 물은 사람이 고새를 못 참고 끼어든다. 유명한 작곡가부터 연주자까지 어떤 곡은 이렇고, 누구 연주는 저떻고, 이건 좋고 저건 별로고, 이야기가 길어진다. 긴 역사에 비례해 할 말도 많아지나 보다.


얼핏 듣기엔 비슷해 보이는 연주지만 사람 목소리와 비슷해 연주자에 따라 많이 다르다. 유명한 거장들이라고 해 다 좋지도 않고, 무명이라고 못 들을 정도도 아니다. 좋다 나쁘다로 나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또 콩쿠르 심사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순위를 매겨가며 들을 이유도 없다. 그저 들으며 짐작한다. 저 사람은 재밌겠다, 감정이 다채롭겠다, 등등 상상하느라 바쁘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따스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도 한다.


드디어 답을 한다. “저는 사랑을 품은 연주가 좋아요.”


어떤 연주자의, 무슨 곡, 어디에서의 연주가 좋다는 구체적인 답변을 기다렸던 기대가 순식간에 파사삭- 깨진다. 굳이 원한다면 답해줄 수는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화려하고 간결하며 날카로운 연주도 매력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은 연주가 와닿았다 설명한다. 묵직한 저음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부드러운 고음의 노래로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연주가 있다 덧붙인다.


유명하지 않은 연주자의 쇼팽 왈츠(op.34-1)를 들었다. 미스터치 투성이에 시간이 갈수록 긴장한 기색이 짙어지며 음들이 많이 빠져 내가 뭘 들은 건가 싶었지만, 연주 내내 사랑을 노래했다. 물론 곡자체도 매우 밝고 서정적이긴 하다.


음을 동글동글 비눗방울처럼 띄운다. 하나, 둘, 비눗방울이 늘어나며 햇빛에 반사된 무지개가 보인다. 일곱 빛깔 무지개가 여기저기 떠다니며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뛰노는 아이에게,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에게, 일촉즉발의 부부에게, 도착한 비눗방울은 터지며 사랑을 퐁퐁 쏟아낸다.


미처 터지지 못한 비눗방울 하나를 몰래 내 마음속에 가뒀다. 작은 방울이 온몸을 타고 다닌다. 손끝에선 다정한 손길로, 얼굴에선 치유의 말로 흘러나온다. 오선지 위의 음표가 연주자를 통해 사랑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당신에게도 사랑의 속삭임을 건넨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겠어요?” 해사한 얼굴로 묻는다. 당신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요, 사랑을 품고 있군요.”


음악은 사랑이다. 슈만은 드디어 이루어진 사랑의 벅참을 피아노 콰르텟 3악장에서 표현했고, 쇼팽은 첫사랑의 설렘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에 듬뿍 실었으며, 브람스는 평생 마음에 품은 사랑에게 인터메조를 헌정했다.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이들보다 더 아름답고 덜 불행한 사랑은 없다. 음표 하나마다 내려앉은 사랑을 빠트리지 않고 표현해내야 한다. 사랑 없는 연주가 완벽할 순 있어도 좋을 수 없는 이유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당신과 나의 삶도 사랑으로 넘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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