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의 노예

100일 글쓰기 - 32

by 모사가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고,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로 시작하는 대화는 황송하게도 원고 부탁이다.


올해부터 2022 개정교육과정 교과서 개발 작업이 진행되어 웬만한 집필진들이 교과서에 매달려있다. 작업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지만 아무래도 교과서가 주는 명예로움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문제집은 홀대받는다. 한정적인 인력풀에서 많은 수가 빠져나가니 사람이 없어 출판사도 애가 탄다. 그러다 보니 친한 선배 오빠의 추천으로 작년 가을 어쩌다 이 시장에 들어오게 된 이후 종종 연락을 받는다. 결국 이것도 다 이너써클의 그들끼리 나눠먹는 인맥 싸움인가. 90년대 초반 학번부터 2000년대 초반 학번까지, 대략 10년 사이의 선후배들이 끈끈하게 포진해있다.


심지어 어떤 출판사는 특정 학교 출신을 선호한다. 교과서 쓰고 문제 만드는데 출신 대학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데, 회장님 의견은 또 그렇지 않단다. 돈 버는 재주 없는 내가 뭘 알겠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원고료는 안 올려주면서 바라는 건 많다 투덜대는 건 애교다.


임용고사 경쟁률이 많이 높아지고 선발인원이 급감한 과목들이 나오게 되어 아예 시험 자체를 응시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지리도 그런 과목들 중 하나인데, 부설학교에서 교생지도를 맡을 때 교사 되겠다는 후배들이 많아야 한두 명, 그것도 다른 교과를 복수 전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지리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자신 있게 뱉기는 어려웠다. 당장 올해 서울에 지리교사를 뽑을지 안 뽑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리교사 품귀 현상이 출판사에까지 영향을 준다. 원하는 학교 출신의, 지리 교과로 임용된, 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의 씨가 말랐다.


지난 추석을 문제 내느라 홀랑 날렸다. 기간 전에 무조건 끝내야 하는 성격 탓에 추석 연휴 동안 속도를 내 달렸다. 고질병인 목 통증은 더 심해지고 장시간 앉아있다 보니 허리도 아팠다. 좁은 범위에서 반복적으로 내니 양질의 문제가 나오기 힘들어 정신적인 고통도 컸다. 마지막 메일을 보내며 다시는 안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는데, 과하게 공손하고 묘하게 불쌍한 전화에 “에효, 그럼 제가 할게요”라 답해버렸다.


성인이 된 이후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살지 않았다. 육아휴직 첫 해에는 적게나마 수당이 나왔고, 두 달의 병가 기간에도 월급은 나왔다. 아무런 수입이 없는 시기는 처음이다. 작년 한 해 동안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썼다. 열심히 아이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은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건 여러모로 좀 불편했다. 아무도 주지 않는 눈치를 나 스스로 보고 조그만 물건 하나 살 때도 망설였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사람들이 욕하는 맘충인가 생각하게 됐다.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문제집을 쓴다. 내가 벌어서 떳떳하게 쓰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벌기도 전에 쓸 생각부터 하는 게 우습지만, 그래서 내가 돈을 못 모으나 보다 체념하지만, 그래도 노동의 대가는 달콤하다. 어제는 한 장 썼고, 오늘은 두 장 쓰고. 정직한 땀방울이 모여 소비의 행복으로 재탄생한다.


어기야디야, 열심히 노를 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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