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고른다. 지나간 옛 가요들이다.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로 시작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거쳐 윤종신의 Annie로 끝났다. 오늘도 20년을 넘나들었다. 꼬꼬마 시절엔 엄마 덕에 김민기와 양희은을 들었다. 가을편지는 아직도 즐겨 듣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쓸쓸한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쓸쓸함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쓸쓸함이 출발하는 곳을 상상해본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일까, 아니면 모든 것들로 꽉 차있는 공간일까. 기억할 추억이 없는 삶은 외롭다. 덧입히고 또 덧입혀진 누더기 추억은 그 자체로 슬프다. 양쪽 모두 쓸쓸하다. 기타와 목소리로만 부르는 노래는 느리게 흐른다. 악기로 가득 찬 곡은 서로 이야기하기 바쁘다. 나만 불러야 하는 노래도, 내가 끼어들기 힘든 노래도, 결국 오롯이 나의 몫이라 쓸쓸하다.
국어사전에 쓸쓸하다는 “외롭고 적적하다”로 설명되어 있다. 적적하다를 다시 찾으니 “조용하고 쓸쓸하다”라 적혀있다. 원래 국어사전이 이렇게 단어 돌려막기를 하는 책이었나, 모르겠다. 덕분에 쓸쓸함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외롭고 조용하고 적적한 쓸쓸함이다.
늦은 밤 노트북 불빛에 의지해 자판을 두드린다. 여기까지만 쓰면 외로움이 스민다. 뒤이어 깔끔한 책상 위 노트북 하나와 창밖의 달빛, 그리고 집안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차분히 정리되어있는 장면이 상상된다. 그러나 현실은 노트북 주변에 일하느라 널어놓은 각종 참고서들과 식어버린 커피가 1/3쯤 남아있는 잔들이 즐비하다. 거실엔 아이가 놀다 만 인형이 소파 위에 나뒹굴고 있다. 복잡하고 여유 없는 삶의 짠한 고독함이 느껴진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틀었다. 이 곡만 듣고 자기로 마음먹었다. 더 듣고 더 쓰다간 저 밑바닥에 있는 감정까지 헤집어야 할 것만 같다. 이렇게까지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자꾸만 예민해진다. 세상을 기민하게 살피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매우 피곤하다.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 느껴지는 감각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이입하는 게 좀 버겁다.
옛날보다 탁해진 양희은의 목소리가 멎고 노래는 끝난다. 흐르는 시간에 목소리가 변하는 건 당연한데 여기서 또 무언가를 느낀다.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과정, 홀로 남게 될 여생, 마지막 순간과의 대면, 그 모든 순간의 쓸쓸함을 떠올린다. 사실 어쩌면 가장 쓸쓸한 순간은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탄생인 것도 같다.
이제 정말 그만해야 되겠다. 쓸데없는 생각의 끝은 꼭 나는 누구인가 같은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이다. 위대한 철학은 사소한 질문에서 나왔다지만, 나는 그냥 잠이나 자는 게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 잘 자고 일어나 아침부터 웃는 얼굴로 "우리 딸 잘 잤어?"하고 안아주는 게 내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