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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Mar 06. 202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00일 글쓰기 - 48


저녁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 집에 있었다. 알람음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지 묻는 문자가 도착했다. 통화 내용은 놀랍다. 당장 내일 저녁 뉴욕, 그것도 카네기홀에서 빈필과 협연을 해달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이야기다.

2월 25일 저녁 8시 카네기홀, 조성진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빈필과의 공연에 올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으로, 친푸틴계 인사로 꼽히는 지휘자 게르기예프와 피아니스트 마추예프의 연주가 취소되면서 조성진과의 협연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카네기홀은 당일에서야 연주자 교체를 안내했고, 실시간 중계도 녹음방송으로 바뀌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밤 10시가 넘으면 집에서 연습을 할 수 없어 급히 연습장소를 수소문했는데, 호텔 로비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새벽 3~4시까지 연습하다 7시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서 출발해 뉴욕에 도착했고, 25분 리허설 후 연주했단다. 2019년 이후에 연주해 본 적이 없는 40분에 가까운 대곡을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암보로 무대에 올랐다. 모든 것이 정상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연주는 좋아야 하고 관객을 실망시켜서도 안 된다.


크렘린의 종소리라는 별명처럼 묵직한 첫 음이 울린다. 지난 연주보다 템포가 살짝 빨라진 것 같다. 우울에서 벗어나 환희로, 라흐마니노프의 삶이 담긴 곡처럼 연주도 뻗어나간다.

오케스트라는 마치 한 사람 같다. 그 많은 현악 주자들이 한 몸처럼 같은 음을 같은 타이밍에 낸다. 모두가 잘 벼려진 칼 같은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뿜어낸다. 그 위를 유려한 피아노가 채워나간다. 힘이 넘치는 강렬한 연주이기보단, 섬세하고 따뜻한 음색으로 넓은 공간을 채워간다. 잘 계산된 듯 하나 그것조차 자연스러워 보이는 놀라운 연주다. 빙판 위의 고독한 스케이터 같던 지난 연주와는 달리, 초원 한가운데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느껴진다. 음들은 청자를 깜싸안으며 위로를 건넨다. 인생에는 투쟁이 아닌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연주는 끝났다. 이어진 인터뷰마저 평소와 달리 말이 빠르고 많다. 흥분할 수밖에 없는 하루였을 테다. 스물아홉의 젊은 연주자는 한편의 영화같은 일을 완벽히 해냈다. 모두가 믿기 힘든 성공에 함께 기뻐하며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축제의 밤이다.

11,000km 떨어진 이곳에서도 감동은 그대로다. 소리로만 전해지지만 눈을 감고 상상한다. 몸속 깊이에서 전율이 시작되어 밖으로 전달된다. 튀어 오르는 음에 같이 뛰고 흘러가는 음에 마음을 내맡기며 음악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결국 연주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 날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아침을 연다. 언제 어느 때든 음악 한 곡 정도의 여유는 남겨둬야 하니까. 따스한 위로와 함께 힘든 하루를 시작해본다.




* 라디오로 방송되었던 조성진의 연주입니다. 지휘자는 야닉 네제 세겡으로, 조성진의 모짜르트 음반에서 협주곡을 지휘했습니다. 2019년 11월에는 한국에 조성진과 함께 내한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고요. 그때 인천아트센터에서 했던 공연에 갔었는데, 마지막 앵콜 전 최고의 관객이라고 칭찬해주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영상이 아닌 음원이라 듣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곡이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으시면 어디선가 들어봤다, 또는 여긴 참 마음에 든다 하는 부분이 있으실 듯 합니다. 아, 마지막 앵콜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0월입니다.


https://youtu.be/66RUML2sG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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