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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Apr 24. 2020

체르노빌 원전 사고 35년

체르노빌, 그 현장을 가다.

2011년 4월의 어느 날.

오후 2시쯤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로 전화가 왔다.

사회부장은 "밥은 먹었나?(네) 지금 체르노빌 상황은 어떻지?(체르노빌이요?. . )"


한 시간 후. 체르노빌 상황을 정리해 보고를 했다.

사회부장은 "음..그럼. 가장 빠른 비행기 편으로 가라. (예? 어디를요? 체르노빌이요?. .)"


보고 당시만 해도 내가 그곳에 가게 되리란 건

상상을 못 했다. 대검 중수부서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인데..설마..했다.


다음 날, 나는 사진기자 선배와 우크라이나 키예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사의 제목, 방향.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도착 즉시 체르노빌 시리즈 기사를 보내라는 게

미션이었다.


키예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사 1편을 썼다.

취합한 모든 정보를 믹서기에 넣고

갈듯..그렇게 정리해서 우크라이나 도착 후

서울로 기사를 송고했다.


편집회의 결과

현장 얘기가 없는게 너무 드러나니

서두르지 말고 체르노빌을

어떻게든 가서 기사를 보내라고

답이왔다.


어떻게든..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출입이 통제된 곳인데..ㅠㅠ


공항에서 택시를 잡았다.

"하리코프스키 마을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확한 주소를 대세요.

아님 차에서 내리시던가."


기사에게 말했다.

"저 택시비 있어요.

요금 달러로 현금 지불할 테니 일단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시간 되심

며칠 저랑 계약하실래요.

출장 왔는데 매번 차를 부를 수가 없어서요.."


택시 아저씨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신분을 밝히고

취재 목적도 말했다.


원전사고 피해자들이 사는 마을로 가서

당시 생생한 증언을 들어야 한다고.

동일본 대지진으로 우리나라도

비상인데. 체르노빌의 지금 상황을

한국에도 알려야 한다고..


택시 아저씨를 만난 게

신의 한 수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영사관과

그 지역에서 사업하시는 분들

도움을 받아 체르노빌 내부 취재 허락을

받았고. 택시 아저씨는 며칠간

나를 관찰하더니 마음 문을 열고

원전사고 피해자를 직접 연결해줬다.


체르노빌 프리퍄티 마을의 첫인상은

공포, 그리고 참담함.

구 소련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 또한 모든 게 갖춰진

어쩌면 지구 상에 가장 완벽한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입구에 들어서면

소방관들의  동상이 있다.


1986.4.25. 새벽.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이들은

방사능 유출 사실을 모른 채

방독면도 없이 열심히 화재 진압을 했고

얼마 뒤 모두 사망했다.



체르노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하리코프스키 지역 사람들 인터뷰. 비록 기사 내용에는 편집이 됐지만, 인터뷰에 응했던 아주머는(하단 좌측) 체르노빌 원전 폭발 당일이 본인 생일이었고, 당시 당직을 서고 있었다고 했다. 사고 후 곧바로 갑상선 암 수술을 했다며 정말 작은 목소리로 새소리처럼 가늘게 말했다.


체르노빌 취재의 80%는

위 사진 정 중앙에 있는 택시 아저씨의 도움이 컸다.

직접 섭외도 나서 주고.

마을 주민들 설득도 해주고.



체르노빌 내 프리퍄티 취재를 마치고

방사능 피폭 검사를 했는데.

위 사진 속 옷들은 방사능 오염이 우려돼

귀국 즉시 모두 버렸다.


9년 전.

부장의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된

체르노빌 취재.


체르노빌  원전사고 35년을 앞두고

당시 기사 1.2.3편을 다시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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