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N잡러 일기] 퇴사 준비와 퇴사 직후의 삶
직장 다니던 시절, 자영업자인 동생이 물었다.
"언니 회사에서 이렇게 밤낮없이 일하면 얼마 받아?"
"많이 받지…"
대답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 많이 일한 만큼 많이 받는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참 씁쓸했다.
조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100프로보다 조금 더 요구했다. 전년보다 높은 목표와 성과, 성장, 기여, 평가 등의 지표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주변을 보살필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고 싶으면 용기 내 퇴사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조직이 주는 소속과 안정을 끊어내는 일이란 도시에서 사막으로 이사를 가는 기분이랄까.
사실 두 번째 퇴사 면담이었다. 첫 번째 퇴사 면담은 임신 사실을 알기 일주일 전에 했었다. 한창 인정 욕구에 불탔던 때라 업무 성과표에 대한 불만과 팀 내 나의 포지션에 대한 입장을 강력히 어필했다.
회사도 고민해보겠다며 일주일 유예 기간을 두었는데 갑작스러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가면 새로운 도전을 해야지 했던 계획이 무산되면서 계속 회사를 다니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육아와 병행 불가한 업무 환경이라는 완전히 다른 사유였지만 두 번째 퇴사준비였기에 더 철저히, 냉정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퇴사 D-6개월, 주말 행사에 지방 출장까지 있던 여름 행사 시즌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주문하지도 않은 스스로의 영업 압박감에 고객 접대를 하던 중이었고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반기별로 제출하는 평가계획서를 작성하는데 조직에서 내 미래가 안 보여 내용을 채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아이를 거의 못 볼 만큼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더 못 볼만큼 더 바빠질 것 같았다.
팀장이 되고, 챙길 업무도, 팀도 계속 커지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나의 아이는 어떻게 하지? 왜 회사를 다니고, 왜 돈을 벌려고 하는 거지? 우선순위에 혼란이 왔다.
그다음에는 자책을 했다. 다들 육아하면서도 잘만 회사 다니는데 나는 나약해. 쿨하지 못해. 애초부터 조직에 안 맞는 인간이었어… 등등등 그래서 더더욱 퇴사는 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스로도 물리지 못하도록 잘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듭 질문했다.
-내가 혹시 감정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닌가?
-다른 대안은 없는가?
-육아로 인한 퇴사는 나의 온전한 선택인가?
-또 하나의 압박감인가?
후회하기 싫었던 만큼 검증에 검증을 또 거쳤다. 회사는 육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지는 않다고 했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소중한 아이에게 그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결심.
나를 위한다면서도 책임져주지 못할 조언들에 흔들리지 않고 차근차근 퇴사 준비를 했다. 당시 담당 프로젝트를 온전히 마치고 다른 팀원들에게 업무 인계 거리를 남기지 않으려 하니 뒤로 6개월이 남았더라. 묵묵히 미련 없이 임하니 일이 더 잘되긴 했다.
D-3개월 차에 드디어 팀장에게 의사를 전달했고, D-1개월에 팀원들에게 알리고 디데이 날까지도 빠듯하게 일을 해 마쳤다. 심지어는 내 뒤로 육아하며 근무할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투머치를 발휘했다.
퇴사 직후. 일단 SNS를 활성화시켰다. 과시욕은 정말 아니었는데 과시할 것이 많았다.
아이가 늦잠 자도록 두고 열심히 차린 아침 식탁 풍경 찰칵,
어린이집 지각 길에도 골목 벽화 배경으로 등원룩 찰칵,
하원 길에 시장 가서 카트에 태우고 찰칵…
예전에는 하지 못 했던 육아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하루에도 몇 개씩 피드를 올리다 보니 진정 인싸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온전히 내 세상이었다.
사실 나는 운이 좋았다. 퇴직금도 넉넉히 있었고, 동생 가게에서 짧은 시간 알바를 하기로 약속도 해둔 차였다. '육아로 인해 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가 주는 엄청난 자존감과 안정감.
<82년생 김지영>에도 나오지만 알바든 뭐든 상관없으니 일이란 것을 놓지 않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회사에 비하면 버는 돈은 적어도 일의 시작과 끝이 명확했고 감정노동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호화로웠던 시간만큼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신호도 다가왔다. 조금씩 가끔씩 그냥 불안했다. 순간순간이 특별했던 아이와의 시간도 3개월쯤 되니 일상이 되었고 알바로만 인생을 채우기에는 내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일하던 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오히려 병이 난다고 했던가. 10년이라는 경력이 단절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라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더 찾아야 했다. 지출도 줄었다지만 버는 것 만큼 비례해서 줄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동생 가게 일을 보면서, 아이 재우고 나서 할 수 있는 프리랜서 일을 찾아봐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프리랜서가 가능한 디자이너, 영상제작자, 기자 같은 스페셜리스트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짧으면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창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를 꿈꿨지만 엔잡러가 되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하는 자발적 조건부 엔잡러가 된 것이다.
by. 이수지(포포포 에디터이자 마케터, 달리운동장 CEO, 에어비앤비 달리하우스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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