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대화] 아빠의 6개월 육아휴직으로 달라진 것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 역을 맡은 공유는 육아휴직을 결심한다. '내 아들 앞길 망칠 일 있느냐'는 시어머니의 비난으로 좌절됐지만.
결론적으로 육아휴직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공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아이를 하원 시킨다. 영화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발만 동동 구르며 김지영을 걱정했던 공유가 겨우 무언가 해낸 것이다. 그러자 김지영은 일을 하고, 자신의 얘기를 쓰고, 웃는다.
비슷한 일이 우리집에도 있었다. 나의 남편은 올해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 전 육아와 가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분명 육아휴직 전후로 바뀐 것이 많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친 지 한 달 반. 풀타임 맞벌이 부모로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남편의 육아휴직이 바꾼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아이들을 재우고 늦은 밤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인성 | 육아휴직하니까 뭐가 가장 좋았어?
브롸이언 | 아이들이랑 더 가까워진 게 가장 좋아. 아이들이 이제 너보다 나를 더 잘 따르는 것 같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어봤을 때 '아빠!'라고 대답하면 으쓱해져. 1호(첫째 아이)는 이제 나 없으면 잠도 못 자잖아. 너 없이는 자도. 얼마 전에 너 일 때문에 늦어서 애들 둘 다 나 혼자 재웠을 때 진짜 뿌듯했어.
인성 | 난 아직 애들 둘 동시에 재워본 적 없는데, 그건 인정. 요즘 난 너무 편해. 오빠 육아휴직 전엔 어린이집 시스템도 전혀 몰랐잖아. 그래서 내가 다 챙겼어야 했는데 지금은 한 명씩 나눠하고. 확실히 육아를 잘 하려면 아이들과 양질의 시간을 함께하면서 책임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같아. 그래서 첫아이 때는 부모 모두 의무적으로 육아휴직하면 좋겠어. 또 좋은 점 있어?
브롸이언 | 음... 네 눈치를 안 봐도 돼서 좋아. 죄책감을 덜었달까. 1호 낳았을 때도, 너 복직할 때도, 2호(둘째 아이) 임신했을 때도 외국에서 일하느라 너 혼자 있었잖아. (남편은 2년 동안 해외 근무를 했다) 그게 항상 마음의 짐이었는데 내려놨어. 대신 육아 짐을 나눠지고 같이 가는 것 같아. 항상 뒤에서 쫓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인성 | 아직 그 짐 다 내려놓지마.ㅎㅎㅎㅎ 나도 이제야 우리가 진정한 육아 동지가 된 거 같아. 한 달 전에 남산 놀러 갔을 때 1호가 갑자기 울고 토하고 그랬잖아. 그때 우리 같이 한 번 웃고는 차근차근 치우고 옷 갈아입혔지. 화 한 번, 짜증 한 번 안 내고. 우리 육아 팀워크가 제대로 레벨업한 것 같았어.
인성 | 힘든 점도 있었어?
브롸이언 | 아이들을 얻고 허리를 잃었어. 애들 안아주다가 허리 아파서 침 맞으러 다녔잖아. 물리적으로는 집에만 있었지만 육아가 중노동이니까 몸이 축나더라고. 장모님이 옆에서 도와주셨는데도 이런데 독박육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 거 같아.
인성 | 또 오빠 최악의 컨디션일 때 가끔 있었잖아. 계속 감기 걸리고 몸살 오고. 나 오빠 열나서 반차 내고 조퇴한 적도 있잖아. 남편 열나서 집에 가봐야 한다니까 회사 사람들이 다 웃었던 거 알지?
브롸이언 | 응ㅋㅋㅋ 그때 2호가 일주일 입원했었잖아. 애들 아파서 병간호하고 나니까 내가 아프더라고. 1호가 심하게 구내염 걸렸을 때도 힘들었어. 아파서 투정 심해진 아이들 하루 종일 데리고 있으려니까 힘들더라고.
브롸이언 | 근데 결과적으로는 할만하던데?
인성 | 왜 갑자기 말을 바꾸지? 좀 쎄한데... 그만할까?
브롸이언 | 아니, 끝까지 들어 봐. 네가 2호 낳고 육아휴직 중에 유독 힘들어했잖아. 위로하면서도 솔직히 100% 이해는 못 했어. 장모님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계셨고 나도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거지?' 육아휴직 시작하고 한 달 정도까지도 그랬던 거 같아. 애들도 좀 커서 둘 다 어린이집 가고, 장모님도 계속 같이 계셨으니까 처음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진 않더라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어. 아, 육아가 몸만 힘든 게 다가 아니구나. 마음이 힘든 거구나.
생각해보니까 넌 단지 육아가 아니라 두 번이나 연속으로 육아휴직하게 된 상황이 힘들었겠더라고. 어쨌든 난 안전한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었고 넌 선택보다는 의무적으로 육아휴직을 했던 거니까. 난 이미 외국에 다녀와서 승진도 하고 비교적 또래보다 커리어가 앞서 있었어. 커리어를 다져놨으니 6개월 정도 휴직을 해도 돌아갈 곳이 보장돼 있었지. 육아휴직이 크게 부담되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야.
인성 | 나 좀 울게. 내 피땀눈물로 오빠 커리어가 쌓인 거구나. ㅠㅠ
브롸이언 | 그러게. 그래서 내 마음이 무거웠나 봐. 아무튼 난 그런 상황이었는데 넌 1호 때문에 1년 3개월 쉬고 복직해서 금방 2호 임신해서 1년도 못 채우고 다시 1년 3개월 휴직하고. 거의 3-4년 동안 제대로 일을 못했더라고. 최근에 네가 강연 준비하면서 '내가 없어졌다', '내가 사라졌다'고 표현했잖아.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이해가 됐어. 난 그런 위기를 느끼지 않았거든.
사회생활을 하던 여성이 엄마가 됐다는 이유로 커리어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데 육아를 반복해야 하니까 괴로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겠더라. 남편이 물리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같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내의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 조급한 마음에 공감하면서 진짜 뭐가 힘든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인성 | 만약 오빠 커리어가 다져있지 않았다면 육아휴직했을 것 같아?
브롸이언 |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큰 이벤트가 없는 한 6개월 정도는 했을 것 같아. 1년은 좀 부담스러웠을 테지만. <82년생 김지영>처럼 아주아주 힘든 상황이었다면, 여자친구였던 사람이 아내가 되면서 임신·출산·육아 때문에 커리어가 끝나버렸다면 그 시발점이 나인 것 같아서 삶의 방식을 고민했을 것 같아. 무리해서 육아휴직했을 수도 있고.
인성 | 브롸이언, 애들 기저귀랑 물티슈 사본 적 한 번도 없지?
브롸이언 | (급당황) 응? 으응…
인성 | 왜 그런지 알아? 오빠가 영아기 육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야. 1호 때는 외국에 있어서 아예 없었지. 같이 살 때도 외국이니까, 친정엄마가 같이 계시니까 당연히 육아는 내 몫이 되더라고. 2호 때도 한국 들어와서 승진 앞두고 한창 바빴고.
브롸이언 | (갑자기 엄청 미안해짐) 그러네... 미안.
인성 | 아냐, 오빠만 미안해할 문제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난 모르겠어. 오빠가 커리어가 불안한 상황에서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을지. 1호 때는 모르겠지만 2호 때는 오빠가 조금 더 일찍 육아휴직해볼 수 있었을 텐데 우리 둘 다 전혀 생각 못 했잖아. 오빠가 한국 들어와서 다시 새로운 일에 적응하고 승진까지 앞두면서 바쁜 상황이 되니까 너무 당연하게 나만 육아휴직했지. 오빠는 아이들 학교 갈 때 육아휴직 쓰기로 하고.
그때 내가 일찍 복직하고 오빠가 육아휴직을 해볼 걸 그랬어. 아마 지금보다 더 격렬하게 싸웠겠지만 그만큼 평화도 더 빨리 찾아왔겠지. 뒤늦게 그 생각이 들더라고. 오빠 회사가 외국계라 워라밸이 보장된다지만 어쨌든 '아빠 육아휴직은 어렵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이번에도 '부서 최초' 남성 육아휴직자였잖아.
브롸이언 | 맞아. 이번엔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그나마 덜 어렵게 육아휴직 하긴 했는데 아직 육아휴직 못 쓰는 사람들이 더 많긴 해. 그래도 내가 한 번 하니까 나한테 와서 많이 물어봐. 관심이 많아진 건 확실해.
브롸이언 | 그래도 늦게나마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같이 노력해보니까 우리 삶의 방향이 험난할지언정 틀리지는 않았구나 싶어. 서로 희생하면서 어디로 돌아갈지 어디서 쉬거나 뛰어 갈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방향은 맞는 것 같아.
인성 | 그건 나도 그래. 갑자기 갈라진 평행선을 달리다 다시 만난 느낌이야.
브롸이언 | 근데 6개월은 좀 짧아~ 3개월 정도 더 해서 2019년 다 채울 걸 그랬어.
인성 | 걱정 마. 나 이제 육아휴직 없잖아. 애들 학교 갈 땐 오빠가 무조건 써야 하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내일 또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잘까?
브롸이언 (등원 담당) | 그래. 내일 1호 옷 뭐 입히지? 아침에 먹일 거 좀 챙겨 놓고 자야겠다.
남편의 육아휴직이 엄마가 된 여성의 고된 서사를 돌연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빠가 육아휴직을 권리이자 의무로 당연히 쓸 수 있을 때, 한 사람만 희생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소모적인 시간은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포털 메인에 남성 육아휴직 기사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아빠 육아휴직'이 뉴스거리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부서 최초'였던 남편의 육아휴직이 1호가 초등학교 갈 때쯤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 남편 육아휴직 한 달 만에 쏟아졌던 에피소드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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