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맨 '빅팬' 엄마의 애정 어린 쓴소리
우리집의 38개월 된 첫째 아이도 번개맨 열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번개맨>에 푹 빠진 아이가 하도 '번개맨, 번개맨'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날마다 무한 반복 번개체조를 하며 ‘번개파워'를 수도 없이 외쳐댔다. 약 한 달 여간 매일 번개맨 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옷은 이미 5년은 입은 듯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아이의 페이보릿 아이템이다.
아이와 우리 부부가 처음 <번개맨>을 접한 것은 인터넷TV 서비스를 통해서였다. 한창 히어로물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키즈 카테고리의 여러 콘텐츠 중 영화 <번개맨과 신비의 섬>을 택했다.
이후 아이는 번개맨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고 EBS 유튜브 채널로 1일 1번개맨을 시청하기에 이르렀다. '번개맨을 만나고 싶다'고 매일 같이 조르던 아이, 결국 우린 뮤지컬 티켓까지 구입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개봉한 영화 <번개맨의 비밀>. 아이가 포스터를 우연히 마주친 바람에 이 또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보면서 사뭇 다른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번개걸'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의 번개걸은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번개맨> 시리즈에 비해 스토리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아이 때문에 나 또한 번개맨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수도 없이 보았다. 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매우 건전한 히어로물임을 잘 알지만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프로불편러 엄마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이힐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싸우는 여성 히어로의 모습은 꽤나 자주 비판받아오지 않았던가.
번개걸 캐릭터는 2015년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 3>에서 첫 등장했고 이어 그해부터 본격적으로 EBS <모여라 딩동댕> 공개방송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들에게도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영웅을 만들어주겠다는 선한 목적으로 번개걸 캐릭터가 탄생했을 거라 믿고 싶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 또한 너무나 많다.
번개걸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비판받아온 여느 여성 히어로처럼 몸이 드러나는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부츠를 착용하고 있다. 악당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 히어로가 입기엔 매우 불편해 보이는 복장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여기에 '여자=분홍'이라는 구시대의 등식을 그대로 적용한 것은 덤이다.
그래도 잘만 싸웠다면 말을 않았을 것. 한데 '전사' 번개걸은 '샤인 샤인 브러시'를 외치며 싸우다가도 어째서 늘 악당에게 당하고 결국엔 번개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히어로이지만 여성이기에 번개맨 보다 약하고 어린 존재여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번개걸은 번개우먼이 아니라 번개걸이고, 번개맨에게 높임말을 쓴다. (참고로 번개맨은 모든 캐릭터에게 '다정한 반말'을 한다)
이 정도 되니 '차라리 번개걸을 만들질 말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분홍색 번개맨 옷을 더 팔기 위해 번개걸 캐릭터를 만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번개걸은 히로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조연, 주변 인물이었다.
번개맨에 푹 빠져 약 2달 여간 번개맨에 거의 빙의가 된 것처럼 행동했던 나의 아이는 여아다. 처음부터 한결같이 아이는 번개걸이 아닌 번개맨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번은 '왜 번개걸이 아니라 번개맨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번개파워는 번개맨만 할 수 있으니까
악당들을 완전히 무찌르고 조이랜드와 번개타운을 구할 수 있는 막강한 힘, 아이들이 열광하는 '번개파워'는 주인공 번개맨만이 갖고 있는 초능력이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건 누구나 당연할 터, 우문현답이었다. 그리고 아쉬웠다.
이왕이면 아이가 번개걸이 되고 싶어 한다면 더욱 반가울 것 같았다. 여성이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용감하고 씩씩하게 싸우는 다정한 '주인공' 히어로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번개걸은 '샤인 샤인 브러시'를 외치는 '조연'이다.
처음 한 달에 한 번 스토리에 등장하던 번개걸은 조연도 못되었던 것 같지만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현재는 빼놓을 수 없는 <번개맨> 크루가 되었다. 앞서 지적한 문제들이 여전히 완전하게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번개맨> 공식 홈페이지는 번개걸을 번개타운의 '정신적 지주'라며 주요 캐릭터로 강조하고 있다.
10cm도 넘어 보이던 공개방송 번개걸의 하이힐도 지난해부터 운동화로 바뀌었다(공개방송과 뮤지컬·영화의 번개걸은 다른 배우다. 번개걸이 2명인 셈. 뮤지컬과 영화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고무적인 변화다. 이미 번개걸의 상징이 돼버려 바뀌기 쉽지 않을 분홍 미니스커트도 내심 기대를 갖게 된다.
내가 번개걸에 대해 사뭇 다른 인상을 받았던 영화 <번개맨의 비밀>. 이 영화는 번개맨의 탄생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더불어 번개걸의 과거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포스터에서 번개걸이 빠진 건 의문이다)
영화 속의 번개걸은 번개맨에 뒤지지 않는 씩씩함과 지혜로움의 면모를 보이며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비교적 번개맨과 대등한 관계로 그려졌다. 번개걸이 번개맨에게 반말을 하거나 '쎄게' 나오는 다소 과장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제작진이 참 많이 애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듯 번개걸은 아이들에게 진정한 히어로로서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너무 한 걸음씩만 발을 떼느라 아주 늦어지는 것이 답답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 히어로'가 우뚝 서는 그날이 쉽게 오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난 <번개맨>의 빅팬이다. 특히 아이와 뮤지컬 공연을 보고 난 후 나 또한 <번개맨>에 푹 빠졌다. <번개맨>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뛰어난 프로정신 때문이었다. 무대의 막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애들 뮤지컬 공연 표가 왜 이리 비싸냐'라고 투덜댔지만 공연을 보고 난 후 '한 번 더 보고 싶지 않냐'라며 도리어 아이를 꾈 정도였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번개맨>을 만드는 제작진과 출연진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다. 고퀄의 연기·노래·춤, 그들의 완성도 높은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 열정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이니까. 애정하는 만큼 모진 쓴소리로 <번개맨>이 더 진화하고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파란색의 번개맨, 분홍색의 번개걸만으로도 엿볼 수 있는 <번개맨>의 뒤쳐진 성 고정관념. 20년이 다 되어가는 장수 캐릭터인 만큼 시대에 뒤쳐지는 부분이 눈에 띄는 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수 년간 쌓아왔던 인기가 앞으로도 의미 있게 빛을 발하려면 시대에 발맞추는 노력도 분명 필요하다.
<번개맨>이 어린이들의 대통령인 만큼 앞으로 아이들에게 더욱 다양하고 폭넓은 꿈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아주길 기대한다. 아이들이 "도와줘요, 번개걸!"을 외치는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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