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봐도 죄책감 없는 애니 추천2] <페파 피그>
아이와 함께 어느 국산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울분이 솟아올랐다. 주말 아침, 엄마가 발을 동동 거리며 주방에서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담는데, 아무도 나와 거들지 않는다. 아빠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아이는 장난감 가지고 논다.
다 같이 먹을 밥인데 왜 주방 일은 늘 엄마의 몫인가. 아이와 함께 성별 분업이 뚜렷한 애니를 보면 볼수록 두려웠다. ‘내 딸도 엄마는 집안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최근 넷플릭스를 정기구독하면서 온 가족이 <페파 피그>(Peppa Pig)에 푹 빠졌다. 돼지 페파 가족이 다른 동물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을 그려낸 어린이 애니메이션이다. 아이가 좋아해서 보지만, 무엇보다 옆에서 함께 보는 엄마도 혈압이 (비교적) 안 오르는 무해한 콘텐츠다. 넷플릭스 말고도 유튜브나 인터넷TV VOD로도 볼 수 있다.
아빠는 누워서 쉬고 엄마는 주방에서 일하는 애니가 징글징글한 이들을 위해 준비했다. 가족 애니로 <페파 피그>를 추천하는 이유 3가지.
<페파 피그>에는 놀이터가 배경 장소로 종종 등장한다. 잘 보면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 돼지 페파의 아빠, 얼룩말 조이의 아빠가 놀이터에 나와서 아이와 함께 놀아준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애니나 그림책을 보면 놀이터에는 늘 엄마만 있다. 아이들이 미끄럼틀에서 옹기종기 놀고 있으면, 한쪽 구석에서 엄마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 그림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온 죄밖에 없다. 어린이집 하원 후, 또는 주말에 놀이터나 키즈카페에 가면 엄마가 월등히 많다.
<페파 피그>를 보고 있으면 아빠가 가사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면들이 눈에 자주 띈다. 엄마가 방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동안 아빠는 스파게티를 만들거나 청소기를 돌린다. 또 첫째 페파와 둘째 조지를 씻기고 자기 전에 책을 읽어 준다. 자선바자회 등 어린이집 행사가 있으면 전날 엄마와 함께 준비한다. 서툰 모습 없이 능숙하게 해낸다. 원래부터 당연히 자기 일인 것처럼.
페파 아빠가 ‘슈퍼맨’이어서 집안 일과 아이 돌보기 모두 해내는 게 아니다. 전업주부도 아니다. 평일에는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기 때문이다.
페파 아빠는 퇴근 후 곧장 어린이집에 가서 페파를 데려온다.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하루를 마무리한다. 주말에는 가족과 늘 어딘가에 간다. <페파 피그> 에피소드 대부분은 페파 가족이 노는 이야기다. 할머니(페파 엄마의 엄마) 집에 가서 텃밭을 가꾸거나 어린이집 친구 가족과 피크닉 하러 가거나. 페파네 주말은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게 디폴트다. 페파가 사는 곳은 영국. 거긴 좀 다른 걸까.
영국 여성들도 아이를 낳는 순간 전쟁 같은 육아에 돌입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아빠’가 있다. 아이의 아빠 역시 육아와 집안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고, ‘공동육아휴직제’ 등의 정책적 뒷받침도 탄탄하다. 기업 역시 한국과 달리 야근·접대·회식을 강요하지 않아 아빠들이 퇴근 후 육아하러 가도 되는 분위기란다(2018년 5월 4일자 <여성신문>, ‘영국 워킹맘의 삶도 다르지 않다’ 참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원조가 바로 영국이다. 영국은 1970년대 후반 이 말을 가장 먼저 썼다. 이미 40여 년 전부터 저녁과 주말 있는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현재 영국 회사들은 평균적으로 ‘9 to 5’ 근무다. 페파 아빠가 오후 5시에 퇴근해 아이를 데리러 가는 건 상상 속 허구가 아니다.
더 나아가 영국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근무 형태를 허물기 위해 2014년에는 탄력근무제를 법으로 제정했다. 일하는 사람이 원하면 재택근무를 하거나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한국은 어떤가. 진통 끝에 겨우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나라다(영국은 주 48시간으로 제한). 우리나라 아이들이 평일에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229.2분. 반면에 아빠와는 겨우 45.5분을 보낸다(2017년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이래도 저출산이 젊은 사람들의 ‘의지박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몇 번이고 돌려본 에피소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일하고 놀기’. 어느 목요일,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는 집에 남는다. 페파가 묻는다. “아빠 안 됐다. 또 일하러 가시고. 엄마는 좋겠다. 일 안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노니까.” 페파 엄마가 당당히 답한다. "놀긴 누가 논다 그래. 엄마도 집에서 컴퓨터로 일해야 해.”
얼마 후 수지 엄마가 페파를 어린이집까지 차로 태워다 주러 온다. 뒷좌석에 탄 페파가 또 묻는다. “아줌마는 일하세요, 노세요?” 수지 엄마가 답한다. “아줌마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체육관에서 일해야 해. 달리기도 하고 점프도 하고 줄넘기도 하지.”
또 하나는 ‘레베카 이모의 휴일’. 토끼 레베카 집에 놀러 간 아이들이 전업주부인 레베카 엄마에게 질문한다. “왜 일을 안 하세요?” 레베카 엄마는 망설임 없이 말한다. “나도 일해. 어린 토끼들을 돌보는 게 누구겠니?”
우리 사회는 회사에 출근하고 월급을 받아야만 ‘일’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워킹맘’이라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업주부도 집에서 일하는데 왜 출근하는 엄마만 ‘일하는 엄마(working mom)’라고 부르는 걸까. 집에서 업무를 보는 페파 엄마도, 가사와 육아에 힘을 쏟는 수지 엄마도, 모두 일하고 있다. 노는 사람은 없다는 것, 모두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알려준 만화 제작자에게 고맙다며 절이라고 하고 싶다.
<페파 피그>에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에피소드가 많다. 페파네는 다 함께 분리수거를 한다. 아빠 엄마가 페파와 조지에게 하나하나 알려준다. 채소 껍질을 일반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페파에게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분리해 모아둔다”고 가르쳐주는 식이다. 페파 가족은 음식물쓰레기통을 들고 주말에 할머니네로 간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그걸 퇴비통으로 옮기면서 아이들에게 또 알려준다. 음식물쓰레기를 텃밭 비료로 쓰면, 그 텃밭에서 맛있는 사과가 자란다고.
그렇게 아이들은 먹고 생활하는 모든 것들을 몸에 익혀간다. 반면에 우리 집은 아이에게 집안일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다. ‘네 살인데 뭘 알겠어’라는 판단이었다. 페파네를 보며 나는 어떤 부모가 돼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외에도 기존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페파 가족은 아빠, 엄마, 여아, 남아로 구성된 4인 가족이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강아지 대니는 아빠나 엄마가 주양육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늘 할아버지와 함께 다닌다.
성별분업을 타파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여성인 레베카 엄마는 중장비를, 레베카 이모는 버스를 몬다. 페파 아빠 회사에서는 고양이 아줌마도 일하고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페파 엄마는 페파 아빠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페파 아빠는 반말한다.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면서 ‘가부장제 패치’가 깔렸나 보다.
그럼에도 <페파 피그>는 아빠의 존재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가족 애니로 손색없다. 영어판도 있으니 아이 영어 학습용으로도 추천!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
1. 엄마인지 가사도우미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애니가 두렵다면
2. 아이에게 ‘엄마도 일한다’고 알려주고 싶다면
3. 아이만 만들고(?) 사라진 남편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한다면
마더티브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mothertive
마더티브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mother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