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 100%의 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워킹맘 후배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아이가 아플 때 팀장에게 보낼 메시지 양식을 저장해뒀다고 했다.
“선배, 죄송해요. 애가 갑자기 아파서 휴가를 써야 할 것 같아요.”
“선배, 죄송해요. 애가 갑자기 아파서 오늘 재택근무해도 될까요.”
“선배, 죄송해요. 애가 갑자기 아파서 오늘...”
내가 있었던 팀은 팀원이 세 명. 후배는 팀장과 함께 선임인 나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는데 늘 ‘죄송해요, 감사해요’라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일하는 엄마는 왜 이리 늘 죄송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후배의 메시지를 보니 나까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팀장에게 보낸 메시지를 찾아보았다. 후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물 표시와 말줄임표는 왜 이리 많은지ㅠㅠ…
전 직장을 퇴사하기 전까지, 나는 항상 죄인 같은 심정으로 회사를 다녔다. 불안정한 아이 상황 때문에 덩달아 업무 처리까지 불안정해지는 상황이 죄스러웠다. 저녁 회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도 1박2일 MT를 못 가는 것도 모두 다.
“애 때문에...”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라도 이런 불확실한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는 이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심정이 됐다. 나 같이 불안정한 사람이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졌다.
많은 직장맘들이 ‘퇴사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회사에 다니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직장맘 친구는 말했다. 회사에서 ‘쩌리(겉절이)’가 되어버린 느낌이라고. 승진은 바라지도 않고 정년까지 채우는 게 목표라고.
<엄마의 탄생> ‘일하는 엄마’ 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일 중심 사회에서 이상적 노동자는 ‘출산이나 양육이라는 가족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풀타임 노동자’이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장애물 없이 생산활동에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노동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들이 이상적 노동자의 전형이 되었으며, 여성들은 노동세계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김보성, ‘일하는 엄마와 살림하는 엄마의 끙끙앓이’, <엄마의 탄생> p.242-243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노동자는 아내가 있는 남성이다. 아내가 있으니 육아에 신경 안 쓰고 안정적으로 일’만’할 수 있고,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일할 거라고 기대 받으니까(그 기대는 종종 어긋나지만…).
엄마로 살면서 나는 결코 100%의 노동자가 될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아이의 요구에 응하는 풀타임 엄마인 동시에 언제나 기업의 요구에 응하는 풀타임 노동자”(p.243)는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오늘도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엄마들에게, 나를 지키며 일하는 방법 4가지를 제안한다.
처음 복직 후 몇 달은 퇴근할 때마다 늘 뒤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나는 정시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엉덩이 한번 못 떼고 열심히 일했는데, 칼퇴근 아니 정시퇴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눈치가 보였다. 졸지에 일 안 하는 직원이 된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시간은 더는 나만의 시간이 아니다. 아이와 나눠 써야 하는 시간이다. 게다가 아이에게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들은 자신이 100%의 노동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늘 죄책감을 갖고 눈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엉덩이를 얼마나 오래 붙이고 있느냐가 아니라 업무의 질이다. 많은 엄마들이 말한다. 내가 이렇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인간인 줄 몰랐다고.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를 낳은 후 회사에서 훨씬 더 밀도 있게 일한다. 애가 나만 기다리고 있을 걸 아는데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집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집에 업무를 싸 들고 갈 수도 없다. 회사에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변을 둘러보라. 사무실에 있는 시간은 긴데 정작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직원이 얼마나 많은가. 컴퓨터 화면에 쇼핑몰, 항공권 사이트 띄워놓고 있는 사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로 수다 떠는 사람, 하루 종일 카톡만 하는 사람, 휴게실이 사무실인 사람…
단적으로 애 낳기 전에 내가 어떻게 일했는지 떠올려 보라. 지금은 ‘애 때문에 일 못한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지나치게 애쓰고 있지 않은가.
기억하자. 우리는 근로계약서에 명시돼있는 업무 시간에만 충실하면 된다. 칼퇴근한다고 눈치 보지 말자. 그거 정시퇴근이다.
육아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일, 불안정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내가 민폐 직원이 된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이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주변에 도움 받을 가족 하나 없는 내 상황을 탓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게 한 직장맘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옆에서 도와주면 되는 거고, 나중에 내가 상황이 됐을 때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되는 거라고. 선배 자신도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고. 그러니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고.
그 말이 내게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복직 후,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큰 힘이 된 건 워킹맘 동료들이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내 일을 대신해주고 괜찮아질 거라고, 아이는 계속 자랄 거라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힘을 준 동료들. 시스터후드를 진하게 느낀 시간이었다.
회사와 동료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나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 회사에 다닐 수 있었고, 새로운 커리어를 찾아 자발적으로 퇴사할 수 있었다. 현재도 일-육아 병행이 가능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아이는 혼자 키울 수 없다. 한 아이를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게 단순히 ‘운’이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민폐라는 자학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료에게도 나처럼 급박한 사정이 생길 수 있다. 그때 내가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면 된다. 당장은 여유가 없다고? 언젠가 엄마의 삶에도 숨통이 트이는 시기가 올 것이다. 아이는 계속 자라니까. 그 빚을 잊지 않으면 된다.
아이가 아파서 급히 휴가를 내거나 재택근무를 신청할 때마다 카톡창에는 비가 내렸다. ‘죄송해요ㅠㅠ 감사해요ㅠㅠ’라는 이름의 비.
급작스럽게 휴가를 내는 건 물론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부담이 된다. 업무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아픈 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지금 없는 휴가를 억지로 만들어서 쓰는 게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우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휴가로 업무에 ‘빵꾸’가 안 날 방법을 생각하는 거다.
애 핑계 대고 얌체처럼 힘든 일만 쏙쏙 피해가거나, 동료들의 배려에도 고마운 줄 모르고 뻔뻔하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혜린 그로잉맘 부대표는 마더티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발 눈치 보지 말라고.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꼭 알리라고. 일 잘하는 건 티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고.
"대표, 부대표인 우리들도 애 때문에 하루 종일 일 못할 때가 있어요. 왜 눈치를 보죠? 일 잘하고 있는데. 성과와 지표가 대변해주고 있는데. 차라리 당당하게 나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만큼 일을 해서 얼마만큼 성과가 나왔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고, 윗사람도 그걸 알고 있어야 해요. 불명확한 일의 모습과 불명확한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일을 많이 하는데도 일을 많이 안 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혜린 그로잉맘 부대표
https://brunch.co.kr/@mothertive/90
죄송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그 사람은 그저 죄송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 감정노동을 어떻게 하면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유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쓰면 어떨까. 그게 결국은 나에게도 회사에도, 동료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어디선가 그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엄마가 일하기 좋은 일터는 결국은 비혼자에게도 일하기 좋은 일터라고.
불필요한 감정노동이나 장시간 노동 없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고,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일터.
가정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회사에 모든 걸 헌신하고 희생하던 시대는 끝났다.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회사는 더 이상 나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일과 삶,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이유다.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노동자 상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어차피 100%의 노동자, 100%의 엄마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자괴감도 죄책감도 넣어두자. 일도 육아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애쓰고 있다.
나를 지키고 싶은 엄마들, '마더티브'가 쓰고 그린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 예약판매중이에요!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가능^^
마더티브 페이스북 facebook.com/mothertive
마더티브 인스타그램 instagram.com/mothertive
에디터 홍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