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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어깨에서 사라진 가방

Ray & Monica's [en route]_411

by motif

천국과 지옥의 시애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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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저희에게 갖은 편의를 제공해 주신 밴쿠버 여러 교민들께 시애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국경 보안 강화 이후 육로 이동이 어떤 분위기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전례 없이 많은 질문을 받은 경험을 전했다.

"다행입니다. 전 그 국경 검문소에서 심사관이 밴쿠버의 내 집에서 산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내 이름으로 받은 전기 요금 청구서를 보여달라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와야 했어요."

캐나다 교민들의 추억 중에도 그 국경에 얽힌 다양한 추억들이 적지 않았다.

60년대에 독일로 가셨던 분께서는 1993년 시드니국제공항에서 여성 심사관 앞에서 속옷까지 벗었던 모욕적 온몸 정밀검사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는 마음을 들여주셨다.

국경 통제는 인간 사회의 고도화된 '영역 표시'인 셈이다.

캐나다의 BC‑99번 고속도로가 미국에서 I‑5(Interstate 5)로 이름이 바뀐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도 시애틀 시내로 들어오자 정체가 심했다. 특히 Ship Canal Bridge 구간 전후에서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밴쿠버 Pacific Central Station에서 시애틀의 Greyhound Bus Station까지 약 230km에 불과한 거리지만 4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국경 통과 시간과 시애틀 I-5 구간의 정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시애틀의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오후 5시가 넘었다. 배낭 때문에 우버를 이용할지를 고민했다. 열었던 앱을 바로 닫았다. 40달러가 넘는 요금보다도 우리가 지나온 그 정체구간을 되돌아가야 하는 것을 감안하면 경전철이 옳은 선택이지 싶었다.

링크 라이트 레일(Link Light Rail)의 Stadium Station이 지척에 있었다. 벤딩 머신에서 ORCA 카드(시애틀 교통카드)를 구입해 충전하고 곧 도착한 라이트 레일에 승차했다. U-District Station까지 일곱 정거장을 너무 짧은 시간에 이동해 그동안 라이트 레일의 역 이름들을 외우려는 계획이 빗나갈 정도였다.

새로운 도시에 이렇게 편리한 대중교통이 있다면 거의 교통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버스 정체를 우려했던 우리는 퇴근길 만원 전철에서 흡족한 마음으로 내렸다. 역에 배낭과 가방을 두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고 내릴지를 가늠했다. U-Dub(UW.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인접한 숙소는 불과 0.4마일 정도 거리였다. 걸어가면 더 좋을 거리이지만 비가 내릴 수 있는 날씨의 어두워지는 때, 겨울옷까지 챙겨온 짐 때문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한동안 우리가 살아갈 도시의 대중 교통망에 바로 익숙해졌으며 도시의 어디나 갈 수 있는 ORCA 카드까지 수중에 있으니 시애틀이 마치 오래 살았던 곳 같은 기시감까지 들었다.

아내가 나보다 더 많은 중량의 더 많은 가방을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 그때 눈에 보였다. 나는 기분 좋게 아내의 배낭까지 끌고 먼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 5분쯤 간 뒤에 아내가 따라오는지 뒤돌아 보았다. 아내는 스마트폰 속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안심한 마음으로 가던 길로 한 발을 내미는 순간, 아내의 어깨에 항상 걸려있던 마야인의 숄더백이 걸려있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급히 뒤돌아 물었다.

"당신의 숄더백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이 가져가지 않았나요?"

그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아내는 번개같은 속도로 뒤돌아 전철역으로 뛰었다. 나도 뒤따라 뛰었다. 거의 모든 가방을 끌고 맨 나는 빈손인 아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아내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고 나는 속도를 줄이며 그 가방 속에 든 내용물들을 꼽아보았다. 떠오르는 한 가지는 한국을 떠난 이후 약 3년간의 사진과 자료들 백업한 파일들과 백업되지 않은 올해의 멕시코와 밴쿠버 파일들이 든 5T짜리 외장 하드였다.

2009년 2달간의 남부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하룻밤의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도난으로 악명 높은 남아공 조벅의 탐보 국제공항(O. R. Tambo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한 잠시 동안에 배낭을 도난당한 기억이 제일 먼저 뇌리를 때렸다. 유럽에서 차 안의 모든 가방을 도난당한 유리창이 깨진 차량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전철역 의자 위에 홀로 남은 아내의 숄더백이 10여 분간이나 그곳에 있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허약한 마음이 올라오는 중에도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그 가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준다면 매 주일마다 교회를 빠지지 않고 가겠다는 맹세나 사찰에 쌀 몇 가마니를 시주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다시 모퉁이를 돌아왔다. 아내의 어깨에는 그 가방이 다시 걸려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아내는 숙소 옆 성당을 다녀왔다. 여행자에게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을 반복하는 주기는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Beautiful Africa _ 1 | 탐보 국제공항에서의 배낭 도난

https://blog.naver.com/motif_1/3004402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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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여행자의일상 #천국과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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