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_79 | 앉은 자리에서 꽃피우기
길을 가다 보면 극한의 환경에서 꽃을 피운 식물을 종종 만난다. 수직 바위의 작은 구멍, 오래된 집 갈라진 벽의 틈새, 계단 구석의 쌓인 흙먼지 위에 핀 꽃.
바람에 실려 가다가 씨가 떨어진 자리가 자신의 한 생을 살아야 할 곳이 되어버리는 식물에게 떨어진 자리가 수직벽의 틈새라고 탓할 수는 없다. 흙먼지가 쌓이길 기다렸다가 안개비가 그 먼지를 적시면 즉시 싹을 내고 서둘러 꽃을 피운다. 한나절 핀 꽃으로 씨를 얻게 되면 한 생의 의무는 해낸 셈이다.
10년 순례자로 살 생각으로 한국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을 길 위에 살아보니 돌 틈에 떨어진 씨앗 모양 제약이 많다. 원하는 지역에서 예산 범위 내의 숙소를 구하는 것도, 방문할 곳도, 만날 사람도, 머물 기간도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탄생에서 죽음까지 과정을 살 뿐인 삶의 속성인 피투성(被投性)의 En route(on the way)상황을 좀 더 능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길 위의 삶을 택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정의한 개념처럼 ‘던져짐 당한 현존재(Dasein)’를 사는 이로써 바람이 내려놓는 곳을 사는 정처 없는 삶에서도 루틴은 있다. 그것은 아침 명상과 기도이다. 매일의 실천 강령은 앉은 자리에서 꽃피우기. 하루를 주기로 사는 것이다. 내일은 믿지 않는다. 수직벽 틈새에서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내일이 오지 않아도 미련이 없을, 마음이 시키는 일로 하루를 사는 것이다.
"Bloom where I am planted.
20230718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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