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사랑에 대한 가장 솔직한 고백

by motifnote


사랑이 스며드는 순간을 붙잡은 문장들 사랑을 말하는 글은 많지만, 사랑 ‘그 자체’를 꺼내 보여주는 문장은 많지 않다. 이병률 시인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펼치면 금세 알게 된다. 이 시집은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깊고 무겁고, 때로는 우스울 만큼 솔직한지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마음 깊은 곳을 문지르는 문장들 때문에 책장을 덮지 못하게 되는… 그런 시집이다.




이병률 시인의 언어는 늘 그렇듯 섬세하고, 감정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이 시집에서는 특히 사랑의 민낯,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서툼, 사랑이 사람을 바꿔버리는 순간들이 아주 솔직하게 드러난다. 특히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표제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사랑이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백처럼 담겨 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전문


이 시집은, 사랑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고요한 아픔까지 담아냈다. 사랑은 충만함을 주는 동시에 결핍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감정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없는 시간은 유독 짧고 어둡게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 주는 결핍을 ‘상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결핍이야말로 사랑을 유지하게 만드는 작은 긴장감이다. 나 또한 사랑을 하면서, 행복과 불안이 늘 거의 같은 속도로 자라나는 경험을 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 감정의 이중성을 이렇게 정확히 말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감정은 차분해지고, 사랑이 남긴 변화에 대한 시인의 관찰이 선명해진다. 사랑은 때로 나를 잃게 하고, 때로 나를 새롭게 만든다. 무엇보다 사랑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남는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게 했던 그 힘의 기억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의 잔향을 오래도록 간직한 채 조금 더 깊은 사람이 되어 간다.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농밀> 전문


이병률 시인의 시에는 흔들림이 많다. 감정이 흔들리고, 풍경이 흔들리고, 시 속 화자의 마음도 흔들린다. 사랑이란 결국 한 사람이 내 세계를 흔들어 놓는 사건이다. 이 흔들림이 불안이 아니라 ‘포근한 낯섦’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나 역시 누군가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하루가 송두리째 흔들렸던 적이 있다. 이병률의 말처럼, 한 사람의 눈빛이 별보다 선명해지는 순간— 그 실루엣이 기억 깊은 곳에 파문을 남긴다.


이 시를 읽으면, 사랑을 통해 세계의 초점이 맞춰지는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은 갑자기 세상을 바꿔놓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변화들— 누군가의 눈 안에 비친 빛, 흔들리는 동공, 그 속에서 내가 자리 잡히는 순간— 그 사소한 징후들을 통해 세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 문장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결국 모든 세계가 그 사람과 연결되는 감각을 말한다. 바람도, 별도, 빛도 모두 사랑하는 이를 통해 해석된다. 이 시집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과 정확히 이어진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쓰는 시집이 아니다. 사랑, 상처, 흔들림, 회복, 다시 사랑하는 법— 우리가 살아오며 겪었던 모든 감정의 결들을 섬세하게 확대해서 보여주는 감정의 지도다. 읽고 나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잎맥처럼 서서히 살아난다. 이 시집은 말한다. 사랑을 하는 건 아프고 벅찬 일이며, 그 모든 감정이 우리를 흔들고, 결국 더 깊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든다고. 이 시집이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랑을 ‘아름답게’가 아니라 ‘진실하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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