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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넼 Sep 12. 2021

어느 쪽에 거시겠습니까?

'파스칼의 내기'를 통해 본 '라이프 오브 파이'

  여러분은 내기를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자주 하신다면 이기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지는 편인가요? 내기는 기본적으로 가능성을 보여주고, 사람의 승부욕을 자극해 모험을 하게 만듭니다. 도박 중독으로 유명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했다는 "주변이 가능성으로 가득한데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라는 말처럼 말이죠. 그리고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내기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내기’ 일 것입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철학자 및 종교 사상가로 ‘밀폐된 용기 속에 담겨 있는 액체의 한쪽 부분에 주어진 압력은 그 세기에는 상관없이 같은 크기로 액체의 각 부분에 골고루 전달된다.’는 파스칼의 원리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데카르트와 같은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도 했죠. 단, 논리가 아닌 확률로 접근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확률적 접근이 바로 그 유명한 ‘파스칼의 내기’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


  도박 중독자가 아닌 합리적인 도박사는 이득은 극대화하되, 손해는 최소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즉 돈을 딸 확률이 높으면서 손해 볼 확률이 낮거나,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 손해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금액이라면 내기에 임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원리를 이용해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내기를 제시합니다.


  먼저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내기를 걸었을 겨우 있을지도 모를 내세를 위해 시간을 낭비하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신이 존재한다면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기회를 잃고,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는 지옥에 가게 되겠죠.

  반대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현세에서의 수많은 쾌락과 기회들을 놓칠 수 있다는 손해가 있겠지만, 이는 신이 존재할 경우의 페널티보다 적은 손해라고 파스칼은 이야기합니다. 즉,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진다고 할지라도 잃을게 전혀 없는 내기’라 생각한 것이죠. 덧붙여 신의 존재가 믿어지는 것은 결국 이성이 아닌 ‘믿음’의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러한 논증은 이후에 종교인들 에게도, 비종교인들 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기는 합니다만, 그 생각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파스칼의 내기를 통해 본다면 그 재미가 배가 되는 작품이 있죠. 바로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입니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야기는 한 소설가가 자신에게 영감을 줄 이야기를 얻으러 파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며 시작됩니다. 곧이어 파이는 자신이 삶 속에서 겪었던 신비로운 경험을 소설가에게 이야기해주죠.


  어려서부터 종교에 심취한 파이는 힌두교로 시작해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가르침에 매료됩니다. 종교보다는 이성을 따르라는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파이. 어느 날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는 사업을 정리하며 동물들을 더 좋은 값에 팔고, 자식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캐나다로 이민을 계획합니다.  

  인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향하는 배에 오른 파이와 가족들. 하지만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됩니다. 배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고… 간신히 홀로 목숨을 건진 파이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 하이에나, 자식을 잃은 오랑우탄 그리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작은 구명보트만을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구명보트에 오를 때 다리를 다친 얼룩말은 서서히 죽어가고, 하이에나는 그런 얼룩말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결국 얼룩말은 하이에나에 의해 죽게 되고, 오랑우탄마저도 하이에나와의 다툼 끝에 죽게 되죠. 그것도 모자라 파이까지 노리는 하이에나. 위기의 순간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등장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지만, 결국 보트에는 굶주린 호랑이와 파이 둘만 남게 되면서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파이는 생존을 위해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식량과 물 마저 모두 잃게 됩니다. 계속되는 생존의 위협 속에서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을 원망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파이. 우연찮게 미어캣이 가득한 무인도에 도착하고, 휴식을 취하지만 그 섬은 밤이 되면 섬 위의 생명체들의 생명을 빼앗아 양분을 삼는 식물들로 이루어진 곳을 깨닫게 되죠. 결국 다시 섬을 떠난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다행스럽게도 멕시코 해안에 도달하며 긴 표류를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리처드 파커는 숲 속으로 사라지죠.


  병원에 입원해 회복 중이던 파이에게 침몰한 배를 소유했던 선박회사 직원들이 찾아오고, 그가 경험한 신비한 이야기들을 믿지 못하는 직원들에게 파이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배가 침몰할 당시 생존한 사람은 파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의 주방장, 일본인 선원 그리고 파이의 어머니가 함께였죠. 다리를 다친 일본인 선원은 감염으로 죽어갔고, 주방장은 선원의 살점을 이용해 낚시를 합니다. 주방장의 반인륜 적인 행위 속에서 파이는 실수를 하게 되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주방장과 맞서지만 결국 주방장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파이가 주방장을 죽이게 되죠.

  즉 얼룩말은 일본인 선원, 하이에나는 주방장 그리고 오랑우탄은 파이의 어머니였고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묻는 소설가에게 파이는 어느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처음의 모험 이야기를 선택한 소설가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속에는 두 이야기 외에도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연출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는 물과 하늘이 그렇죠. 티 없이 깨끗하고 맑은 물에 하늘이 비추어졌을 때 그것이 물 표면에 비친 하늘인지, 진짜 하늘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물 위가 아닌 우주 속에 떠다니는 듯한 기분마저 들게 만들죠. 또한 생존에 대한 희망인지, 다시 바다로 가야 하는 절망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섬의 존재, 풀을 먹는 동물과 육식하는 식물 그리고 이야기가 없는 소설가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파이 등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작품 속 장치들과 연출은 파이의 두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지 더욱 모호하게 만듭니다. 누가 봐도 현실적인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이겠지만, 처음 이야기를 해주던 파이의 표정은 진심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것 같았죠. 파이의 본명이 티 없이 깨끗한 물을 지녔다는 파리의 피신 몰리토 수영장에서 따왔다는 설정 또한, 물에 비추인 하늘이 진짜 하늘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진실이 투영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는 설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파이는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자신의 본명이 소변을 본다는 피싱과 발음이 비슷해 놀림받자 파이의 소수점을 모두 외우면서까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정도로 기존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니까요.


두 이야기를 보여주 듯 모호하기만 한 하늘과 바다의 경계


  그렇기에 자신이 겪은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고 새로운 모험 이야기를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요구하는 선박 회사 직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가 진실인 것 같나요? 작품 속에서 선박회사 직원들과 소설가는 모두 첫 이야기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앞서 언급했던 파스칼의 내기와도 연결 지어 볼 수 있죠. 첫 이야기를 선택한다면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를 듣고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이야기를 선택한 것만으로도 파이는 그 사건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이야기를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손해 볼 것이 없죠. 반대로 두 번째 이야기를 선택하게 된다면, 파이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겪은 것이 되며, 듣는 이들 또한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생존 본능에 대해 착잡한 마음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파스칼의 주장에 따라 본다면 두 이야기 중 더 좋은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가 되는 것이겠죠. 그리고 그의 주장과 같이 믿기 어려운 첫 이야기를 믿는 것은 신의 존재와 같이 믿음의 문제인 것이라고, 파이도 이야기합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가 더 좋아 보이시나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선택한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여운이 남고, 그것이 포기한 다른 이야기를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유익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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