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넼 Sep 30. 2021

그의 웃음이 불편함을 주는 이유

공감을 통해 보는 영화 '조커'

  올해 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가 있었습니다. 바로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의 과거 학교 폭력을 폭로하는 ‘학투’ 말이죠.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던 학투 의혹에 사람들이 분노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문제에 공감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 비슷한 일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생긴 공감, 혹은 그런 경험이 없을지라도 사회적으로 폭력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과 선에 대한 공감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반대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던 거짓 폭로 역시 타인의 관심과 공감을 바라는 왜곡된 연결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하는데요. 도대체 공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공감의 사전적 의미는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이라 합니다. 즉 타인이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당사자를 알거나, 비슷한 일을 경험해 보았기에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인간의 뇌에 있는 ‘거울 뉴런’입니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행동을 할 때 마치 거울에 비추듯 그것을 따라 경험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관이죠. 더 나아가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감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과 공감의 결여 그리고 거울 뉴런까지를 스토리와 연출, 연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조커’입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 호아킨 피닉스 주연 '조커(2019)'


  배트맨의 숙적 조커의 기원을 그린 영화 ‘조커’는 빼어난 연출과 호아킨 피닉스의 미친 연기로 어떻게 아서라는 인물이 조커가 되어가는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서는 대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그런 광인이 되었을까요?

  저는 ‘공감의 부재와 왜곡된 공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아서는 가난과 질병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타인에게 웃음을 주며 가치를 남기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성공한 코미디언인 빌 머레이를 동경하기도 하죠. 하지만 빌 머레이의 죠크와는 달리 아서는 타인에게 웃음을 주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서와 머레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영화에서도 나오는 머레이의 죠크는 많은 고담 시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풍자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아서의 웃음은 어떤 감정의 표출이 아닌 질병이기에, 그의 웃음을 보는 사람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기괴하고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후반부 머레이 쇼에 출연하면서 웃음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공감할 수 없는 아서 자체가 희화되는 비웃음입니다.


  또한 웃음뿐 아니라 웃음 뒤에 가려진 슬픔도 공감받지 못합니다. 상담사는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공감해주기보다는 일로써 대하고, 자신이 아버지라 생각했던 ‘토마스 웨인’은 그를 불쾌하게 여기며, 믿었던 어머니마저 친 어머니가 아닌, 상상으로 만들어낸 아들을 그에게 덮어 씌웠을 뿐이었죠.


  이렇듯 공감받지 못하는 웃음과 슬픔은 아서 자체입니다. 웃으면서 웃는 또, 웃으면서 우는 아서의 표정을 호아킨 피닉스가 소름 끼치게 표현해주죠 결국 그는 자신을 공감해줄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소피’와는 상상을 통해 관계를 맺기도 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공감해 주기도 하죠. 이러한 모습은 마치 ‘거울 뉴런’처럼 거울에 상이 비치듯 연출됩니다. 소피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아서의 모습이나 스스로 공감해 줄 때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마치 거울에 비추인 모습 갖죠.


영화 곳곳에 마치 거울에 비추인 것과 같은 연출이 가득하다.


  그렇게 수많은 비극을 경험하던 아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공감을 경험합니다. 바로 ‘분노’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탄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변호사들은 아서를 조롱하고 폭력으로 이어지자 견디다 못한 아서는 분노로 인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릅니다. 이렇게 일어난 아서의 첫 살인은 상류층에 반감을 갖고 있는 고담 시민들에게 공감을 받습니다. 그걸 알게 되자 스스로 살인을 정당화하죠.


  이렇게 공감의 부재와 왜곡된 공감을 경험한 아서는 자신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살해해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속 자신과 합쳐지듯 웃음과 분노가 합쳐져 결국 광기가 되어버리죠. 실제로 초반부 그의 슬픔과 웃음에 경계가 없듯 후반부의 웃음과 분노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머레이 쇼에서의 죠크가 웃음을 위한 것인지 분노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던 것처럼요.


  어떠신가요? 그 어느 때 보다도 디지털화되고 개인화된 사회 속에서도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연결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거나 잘 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처음 이야기했던 이슈들처럼 직간접적으로 많이 접하고 있죠. 어쩌면 그렇기에 조커라는 작품 자체가 흥행을 떠나 어떤 사회적 ‘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감받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공감을 얻은 것이죠.

이전 13화 쳇 베이커, 그의 삶이 음악이었음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