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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un 14. 2022

퇴사 베테랑,
<'나' 고용계약서>를 쓰다

나님아, 이런 인재, 감당할 수 있겠어? 

 나의 '회사원' 으로서의 정체성은 아마도 2013년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 이후에 프리랜서로 일하다 간간이 두 번의 입사를 거쳤지만, 4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다. 입사의 이유도, 퇴사의 이유도 갖가지다. 2008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에 회사에 처음 들어가 2013년까지 끊기지 않고, 소속은 달라졌을지언정 월급쟁이 생활을 이어했다. 꼬박 6년이다(그리 길지는 않았네). 이 6년 사이 사원이 계장이 되고, 매니저가 되고, 과장급이 되었으니 한 회사에 쭈욱 근무했던 사람들보다는 승진 속도가 빨랐으려나. 승진도 잘하고 성과도 잘 내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데 내 근속연수는 늘 메뚜기다. 가장 오래 다닌 곳이 1년 11개월 남짓. 다시 입사할 때는 스카우트 제의가 가장 많았다. 스카우트 제의든 열심히 지원서를 작성해 다녔던 곳이든, 다녔던 티를 한껏 내며 일하다 퇴사했다. 


 빠르게 성과를 내고, 변화를 주도(?)하는 성향인 데다, 내 사업을 하고자 하는 야심 만만한 특성의 사람으로서 조직생활에는 역시 적응이 쉽지 않다. 혼자 사업을 하고, 시도하고 결과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터라, 입사만큼이나 퇴사가 두렵지 않다. 흥미로운 분야에 가볍게 들어가 성과를 내고, 이곳에서 보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느껴질 때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퇴사를 했다. 어느 회사이건 퇴사를 할 때 내가 들었던 이유는 무언가 안 맞고, 무언가가 아쉬워서일 것이다. 혹은 그저 자유롭고 싶고, 마음껏 재능을 펼치고 싶은 열정과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있듯, 근로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춘 완벽한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혼자 일한다고 완전한 건 절대, 전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늘 퇴사 이유는, 회사의 탓이 아닌,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의 문제다.  


지난 6월 10일, 인생에서 만났던 8번째 회사에서 퇴사하고 (그 회사와는 감사하게도 글을 기고하거나 특강 강사, 혹은 기획업무에 대한 아웃소싱 등을 프리랜서로 함께 협업하기로 했다) 아마도 한동안은 어느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조금 더 신중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계의 과제는 어딘가에 소속되든 안 되든 여전히 남아 있다. 




 다시 혼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보통은 사업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이번엔 사직서를 썼던 경험을 떠올리며 '고용계약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직서는 철저히, 피고용자의 입장에서 쓴다. "피고용자로서 이러이러하게 일했지만 저러저러한 사유로 퇴사합니다." 사직서를 쓰고 입장을 전하는 과정에서 퇴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보지 않았던 사장의 입장으로 돌아와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야, 보란 듯 사직서를 던지고 나온 나님아, 너 얼마나 잘났는데? 얼마나 일할 수 있는 건데?" 


 나는 나를 고용해 필요한 만큼의 월급을 주어야 하고,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집과 밥, 차를 제공하고 이 녀석이 가진 사명을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전방위의 지원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어떤 복지와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는지,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어떤 비전을 나에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머무르자 이전의 프리랜서로서 나를 꾸려나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1. 조직이 나에게 준 건 결코 만만한 임금이 아니었구나. 


 매 달 이만큼의 돈을, 혹은 매년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건, 그만큼 하는 일의 범주와 영향을 늘려야 한다는 뜻일 거다. 가만히 앉아서 내가 나에게 최저임금이라도 줄 수 있으려면 어떤 구조로 캐시카우를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의 구조를 만들어본다. 이전, 야심 차게 프리랜서로 일해보겠다며 사회 속으로 박차고 나와 닥치는 대로 일을 잡아하는 것과,  계획과 구조를 가지고 비전을 만들어가며 기회를 차곡차곡 만드는 것은 다르구나. 연봉을 정하는 것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 근무시간의 룰을 정하며 나에게 다정하기로 한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의 최대 장점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고객사에 맞춰 시간에 쫓겨 일과 삶의 밸런스가 깨지기도 한다. 사실 내 일을 하면 그만큼 일이 재밌기도 하다. 그래서 더 일을 열심히 하... (회사원은 회사의 노비, 프리랜서는 백만 스물하나 고객사의 노비...


 사장으로서 소중한 인재인 나의 복지를 위해 회사를 다니며 아쉽다고 느꼈던 룰을 바로 세워보기로 했다. 하루 10시간(아침 8시~저녁 8시)을 근무시간으로 정하되, 근무시간 중 휴식시간이나 운동시간을 하루 중 꼭 2~3시간씩 할애하고, 저녁 8시 이후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으로 쓰기로 했다. 토, 일요일 주말은 휴일을 지키되, 부득이 일하게 되는 날에는 평일의 자유시간을 2시간 더 늘려서 쓰기로 했다. 일하는 시간조차, 나를 위한 시간으로, 새로운 배움, 채움, 운동, 명상하는 시간뿐 아니라 청소와 빨래, 요리를 하는 시간들까지도 침해당하지 않도록 장치를 만들고 보니 뭔가 건강한 시간표를 갖고 일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3. 업무의 범위를 정했다. 

 뭐든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않고, 아웃소싱이나 의뢰를 주는 일들의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비용 절감이라는 게 꼭 비용절감이 아닌 경우들이 있다. 경영자로서 또 근로자로서 모든 것들을 다 해내려고 하는 시간이 오히려 준비와 계획, 고민하는 에너지를 쓰느라 속도를 지연시킨다. 투자를 하려거든 제대로, 광고나 홍보, 홈페이지 만드는 것 같은 것들은 과감하게 아웃소싱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근로계약서에 업무의 범주를 구체적으로 적어 넣으며 내가 가장 강점을 발휘해야 할 부분과 외주를 주어야 할 일들의 범주를 나누니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돈은 더 벌어야 하겠지만.) 


4. 최고의 복지는 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사람들과 삶의 방향성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시간, 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에서 배우는 시간, 새로운 경험을 쌓고 몸을 움직이는 시간들이다. 일에 치여 이 시간들을 희생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 시간들을 우선순위로 일이 소홀해져서도 안된다. 그저 조화롭고 밸런스 있게 시간을 꾸린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복지 데이로 쓸 수 있도록 할애하고, 복지 휴가를 연간 15일 정도 (근로기준법에서 허용하는 연차휴가의 수준이다) 써보기로 한다. 




 사장의 입장에서 나를 고용하려다 보니, 근로계약서를 쓰겠다고 고려한 사항이 생존을 염두에 두고 작성할 때는 악덕 업주도 이런 악덕업주가 없다 싶었다. 그리고 다시 차근차근 한 항목 한 항목을 읽어보며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게 정돈하다 보니 '나 사용설명서'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근로계약서 기반으로 나를 꾸려나가는 프리랜서가 되자, 번아웃이나 환경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밥도 주고 집도 주고 차도 주고 책과 시간도 허용해주는 나 같은 사장이 어디 있나 싶다(충성해라 나님아!). 그러나 나는 밥, 집, 차, 책과 시간으로 월급의 반 이상을 뜯어가는 악덕 사장이기도 하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란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관념으로 가 아닌, 시스템이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비단 나에게조차 친절하기 위한 룰이 필요하다. 그 룰을 스스로 만들고 지켜나가려는 노력은 타인과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룰을 만드는 행동으로 연결될 것이다. '프리랜서로 살아남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리랜서로 세상과 공존하기'일 것이다. 


나는 고용노동부 사이트의 <표준 근로계약서 7종> 서식 중 외국인 근로자에 해당하는 서식을 활용해서 썼다. 혹시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아래 링크로 들어가 보면 된다. 
 https://www.moel.go.kr/policy/policydata/view.do?bbs_seq=2019070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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