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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Feb 18. 2021

욕망을 실현시키는 역량을 키우는 삶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북리뷰 

 스피노자를 읽고 있다. 에티카에 대한 악명이 높아서, 바로 에티카를 읽을 용기는 없었는데, 이따금 교보문고사이트를 둘러보다 운명처럼 얻어걸리는 책이 생기곤 한다. 이번에는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저자인 김길현선생님은 정신과 의사이시면서 스피노자에 심취하신 분이다. 정신과의사라 그런지, 문체가 따뜻하고 섬세하다. 몸과 정신의 사이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위로받았던, 혹은 깨달음을 얻었던 내용을 적어본다. 




#우리의 '행동'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어찌 보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욕망이라는 방아쇠에 의해 당겨져 발사되는 탄환과 같습니다. 주지하듯 욕망이 없다면 행동은 시작될 수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우리는 방아쇠의 움직임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즉시 발사될 뿐입니다. 욕망은 원인이며, 행동은 그 결과입니다. 또 욕망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우리 영혼의 저 깊은 무의식에서 이미 결정을 내립니다. 
 이렇게 의식과 무관하게 욕망에 실리는 순간, 행동의 탄환은 정확히 발사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총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무의식적인 욕망이 이미 우리의 총을 선택하고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 따라 행동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이란 아예 없으며, 다만 무의식적인 욕망의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 

오만했었나. 무엇이든 자유의지라 생각했던 탓에 지나간, 내가 의지로 저질렀다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얼마나 후회와 자책으로 기억속에 얼룩졌던가. 


스피노자는 지나간 일들에 대해 자유의지 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욕망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나는 무엇을 원했기에, 후회될 행동을 이어왔던가. 필연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이루어진 일의 결과는 새로운 미래의 원인이 되어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일어난 모든 행동의 결과는 삶 속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몫이 된다.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조금 더 지혜로운 행동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라는 존재로서 오롯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원하는 것을 그나마도 덜 후회할 방법으로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배움과 성숙으로 이성을 다듬어 욕망을 실현시키는 싹을 틔울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역량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이성에 의한 인식 능력 모두를 말하는 것이겠지요.(중략) 실은 이성은 오히려 욕망을 만들어 줍니다. 새로운 욕망을 계속 샘솟게 해 주니까요. 즉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성은 욕망의 새로운 싹을 키워 내면서 욕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내 안의 무의식에서 욕망이 싹틀 때 내가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면 보다 풍요롭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더 큰 욕망을 꿈꾸고 실현해내기 위해 이성이 그 싹을 키워내기도,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삶을 배운다는 것은 욕망을 이뤄낼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이 곧 성장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올라오는 불가사의한 욕망의 힘을 배움과 성장의 힘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삶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꿈을 이뤄낼 수 있는 자유.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무의식에 영향을 비치는 이성적 인식과 배움을 선택할 수는 있다. 내면의 욕망에 귀기울이고, 그를 위한 건강한 배움을 거듭해 나갈 수 있는 자유. 지나간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지난날의 내 역량이 그만큼이였음을 포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관대함. 스피노자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다보면 자책과 죄책감으로 점철되었던 과거가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는다. 내 존재를 보존하고 내 자신이 자신 안에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욕망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라고 했다. 그리고 코나투스가 상상하는, 긍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것들과 '결합' 하라고 했다. 그러면 욕망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욕망과 일치하는 삶은 어디에 있는가(#지금 여기 누림) 


 스피노자가 삶의 의욕(코나투스)을 증대 혹은 하강시키는 '감정' 을 이야기할 때 '몸' 을 언급한 것은 퍽 흥미롭다.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철학에서 오랬동안 푸대접받아왔던 '몸' 을 수면위로 끌어올렸다는 점 ("정신과 육체는 하나입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그 둘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금기의 유혹으로 일컬어졌던 '욕망' 을 인간의 본질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몸쓰는HRD연구소' 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스피노자가 언급한 '몸' 에 대한 관점에 무척 공감이 간다. 몸을 재조명하면서 스피노자는 '구원의 세계' 혹은 '이상적 세계' 라고 일컬어졌던 내세 혹은 정신적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 에서 기쁨을 누리고, 생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실체 없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 삶의 세계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소박하게 말하면, 현실에 닿아 있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기쁨을 추구하는 삶, 가치창조의 주체가 되는 삶


 스피노자에게는 선악의 개념도 코나투스가 상승하느냐, 하강하느냐로 연결된다. 흔히 말하는 맹목적인 도덕관념이 아닌, 삶과 죽음의 갈림이 선과 악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행동들은 나를 살게 하는 가치와 나를 죽게 만드는 가치로 환원된다. 그러니까, 행동의 혼란으로 나를 죽어가게 하는 가치와 결합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살게 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나를 살게 하는 가치란,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기쁨이란 당신의 몸에 활력을 불어놓고 삶의 의욕을 증대시키며, 동시에 당신의 정신을 보다 큰 충만으로 이끄는 감정입니다." 


기쁨을 주는 것과 결합하기 위해, 스피노자가 언급한 '몸' 을 면밀히 살펴보자. 두근거리는 심장,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 마주칠 때마다 연신 나오는 환호와 감탄, 살짝 올라가는 체온 등 영혼이 반응하게 하는 감정은 분명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타인이 주는, 외부 환경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이 반응하는 선악의 기준에 따라 욕망의 방향을 정한다면 스스로 가치를 정할 수 있는 가치의 창조자로서 살 수 있다. 자칫 이기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회적 존재로서 더불어 사는 우리가 기쁨의 가치를 주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결코 사회악의 방향과 일치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충만하게 타인을 사랑하고 수용하며 삶에서 주어진 역할을 풍요롭게 이뤄가는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 사랑이 충만한 삶


 기쁨 중의 기쁨은 사랑이다
. 그래서 스피노자는 모든 감정의 어머니가 '사랑' 이라고 강조한다. 


 "사랑은 외부의 대상이 주는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기쁨입니다." 


 앞서 기쁨을 주는 가치를 주체적으로 정하고 추구하는 삶을 이야기했는데, 기쁨 중의 기쁨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스피노자는 비로소 '외부의 대상' 을 언급한다. 인간은 본성상 자기애에 기반한 기쁨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경험과 감정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성을 넘어서는, 한 사람의 코나투스를 밝게 빛나도록 비추는 기쁨의 근원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대상을 찾았다는 뜻일 터다. 나를 살게 하는, 기쁨을 주는 무엇이라면 사람이든, 학문이든, 지혜든, 이상이든...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살게 하는 것들을 바라고 이루고 추구하며 사나보다. 


물론 이러한 특별함을 만드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부여하는 특별함이 대상을 비추고, 그 대상이 발하는 빛이 나를 빛나게 하는 코나투스가 된다. 자꾸만 대상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감수성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대상과 마주쳐 사랑을 계속해서 재발견하는 행위는 삶의 동력이 될 것이다. 어쩌면 사랑의 주파수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착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런 착각이 사랑을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울수록, 진정한 사랑은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고, 포용하려 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 때문에 사랑은 욕망이 이끄는 필연이며,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삶을 기쁨과 이해로 가득 채우는, 따라서 세상을 살아내는 포용의 지평이 넓어지는 성장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다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커지는 것 역시 기쁨이 커지는 과정일까. 진정한 사랑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을 기르는 행위이며 상대가 만족할만한 완벽한 그 누군가가 되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대상에게 사랑의 행위를 선물하는, 실천력에 기반한다. 


# 욕망을 능동적으로 찾고, 찾아낸 욕망을 실현해 낼 자유 

 

 스피노자의 말대로라면, 선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의 기쁨과 슬픔, 즉 코나투스의 상승과 하강을 중심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결정의 기준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의거한 것일 뿐, 타인에게 섣불리 들이밀 수 없다. 나에게 기쁨이 되는 가치라고 해서 타인에게도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내가 나의 코나투스를 상승시키기 위해 타인의 코나투스를 하강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코나투스에 대한 기준과 잣대를 끊임없이 다듬고 연마하며 성찰을 거듭하게 된다. 타인에게 나의 기준을 들이밀기보다, 보다 폭넓고 풍요한 기준을 가지고 살려는 노력, 그로 하여금 쌓이는 고독력이 한 존재의 코나투스를 더욱 밀도있게 만든다. 그러나 성찰력이 부족한 경우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투영해 상대에게 내 기준을 인정해달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결국은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자신의 기쁨만을 위한 기준과 잣대를 보다 폭넓게 확장할 수 있는 사랑이 성숙과 배움을 촉발하고, 이성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는 동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찰은 한편으로는 사랑과 잠시 떨어져 스스로를 성찰하는 고독력에서 나온다. 고독한 가운데 진정으로 원하는 것(욕망)을 찾고,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역량을 다듬고, 그를 위한 행동으로 이끄는 욕망의 흐름에 올라타 그로 하여금 일어나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란 행동에 대한 자유가 아닌, 욕망을 능동적으로 찾고, 찾아낸 욕망을 실현해 내는 역량을 길러나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솔직한 가운데 역량의 부족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랑을 바탕으로 부족한 가운데서도 욕망을 실현시킬 역량의 계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배우고자 하는 삶의 성실성과도 일맥 상통한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생각의 반복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당연할지 모른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그에 대한 답을 쉽게 얻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삶은 녹록치가 않다. 또한 잘 사는 것의 기준과 방법은 저마다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기준과 삶의 맥락 사이에서 타인의 욕망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빼앗긴 채로 휘청거리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생의 의지에 대한 욕망)"를 상승시키는 기쁨 (= 선善) 을 추구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감각을 열어두고, 감각에 충실한 행동이 몸에서 우러날 때, 그 행동이 지혜로울 수 있도록 이성을 역량으로 계발하여 욕망을 실현시키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현대인들의 인생이 변화하는 환경과 수많은 기준 속에서 휘청거리는 시점에 스피노자가 제시한 기준은 꽤나 심플하면서도 명쾌하다. 나를 귀하게 여기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코나투스의 공명이 이어지는 기쁨과 사랑의 삶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스피노자 덕분에, 욕망을 실현하는 내 역량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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